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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칸트 철학에 담긴 행복(3)

by 행복 리부트 2026. 3. 18.

고대 그리스부터 수많은 철학자가 착각에 빠진 명제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이라는 명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랬고 에피쿠로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지식을 쌓아라, 마음의 평정을 찾아라 라며 행복에 이를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깐깐한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철학의 목표 자리에 행복을 올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 했습니다. 칸트가 보기에 행복은 철학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는, 너무나도 변덕스럽고 위험한 개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은 통장에 돈이 쌓일 때 행복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낮잠을 잘 때 행복합니다. 심지어 끔찍한 악당은 남을 괴롭히고 짓밟을 때 쾌락을 느낍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에 따라 변하며, 때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는 감정을 어떻게 인류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닌 칸트의 생각입니다.

공리주의를 향한 분노

칸트가 활동하던 시기에 영국에서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가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 주장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공리주의의 유명한 슬로건입니다. 열 사람 중 아홉 사람이 행복하다면, 그것이 곧 선이고 도덕이라는 것이죠.

칸트는 이러한 계산법에 화가 났습니다. 만약 아홉 명의 다수가 한 명의 소수를 노예로 부리며 안락함을 누린다면, 그것이 과연 도덕적인 사회입니까?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한 인간의 존엄성은 짓밟혀도 되는 것일까요? 칸트에게 이러한 행위는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야만이었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적용하는 순간, 인간은 그저 숫자로 전락하고 수단이 되어버립니다. 칸트는 엄격하게 말합니다. 도덕은 행복을 계산하는 대상이 아니다. 도덕은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는 무조건적인 의무, 즉 정언명령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억울한 착한 사람들

그렇다면 칸트의 말대로 묵묵히 도덕법칙을 지키고 살면 어떻게 될까요? 불행하게도 현실은 동화가 아닙니다. 현실에서는 착한 사람이 반드시 행복하진 않습니다. 여기에 두 명의 상인이 있습니다. 한 명은 정직하게 물건을 파는 칸트적인 상인입니다. 다른 한 명은 원산지를 속이고 저울을 조작하는 사기꾼 상인입니다. 현실에서는 사기꾼 상인이 돈을 긁어모아 떵떵거리며 행복을 누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정직한 상인은 불황에 시달리며 파산 위기에 처하고, 매일 밤을 눈물로 지세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우리의 마음은 흔들립니다. 도대체 나만 왜 착하게 살아야 하지? 나도 저 사기꾼처럼 적당히 타협해서 돈이나 벌고 행복하면 안될까요? 나도 그렇게 원산지를 속이고 저울을 조작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칸트의 서슬 퍼런 일침이 날아듭니다. 네가 도덕 법칙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부자가 되거나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냥 지키는 것이다.

칸트의 위대한 폭탄선언

칸트 철학의 핵심은 여기서 등장합니다. 칸트는 행복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는 자연스러운 본능을 그도 인정했습니다. 다만, 행복을 추구하는 순서와 자격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도덕법칙을 지켜서 행복해질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여서 얻은 돈으로 비싼 시계를 차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 사람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일지 몰라도, 칸트의 눈에는 행복을 누릴 자격조차 없는 쓰레기일 뿐입니다. 반면에 지금은 굶주리고 남들에게 조롱받더라도,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고 인간의 도리를 다한 사람은 그 자체로 행복을 누려 마땅한 고귀한 존재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칸트는 말합니다. 쾌락과 편안함을 쫓아다니는 얄팍한 삶에서 벗어나십시오. 비록 육체는 고단하더라도, 이성으로 세운 도덕법칙을 스스로 지켜냈다는 자부심으로 세상을 사십시오. 나는 짐승처럼 본능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답게 살았다는 스스로에 대한 무한한 존중감을 가지십시오. 칸트는 이처럼 엄숙한 자격 증명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정신적 승리이며 행복이라고 보았습니다.

칸트가 신을 부활시킨 이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가슴 한구석이 여전히 답답합니다. 자격을 갖추는 건 좋은데, 평생 억울하게 살다가 죽으면 너무 불쌍하지 않나요? 맞습니다. 칸트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기계는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도덕적 의무가 중요하다고 해도, 도덕적인 사람이 끝내 불행하게 생을 마감하는 세상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이 부조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착한 사람은 그에 합당한 행복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이고도 이성적인  갈망입니다.

칸트는 도덕(덕)과 행복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이상적인 상태를 최고선(Highest Good)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 현실 세계인 현상계에서는 이러한 최고선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기꾼이 잘 살 수도 있으니까요. 여기서 칸트 철학의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면,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줄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이런 존재를 불러 오는 것을 요청(Postulate)이라고 하였습니다.

칸트는 사기꾼이 벌 받고, 도덕 법칙을 지키는 사람이 복을 받기 위한 세상을 만드는 데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살아있는 짧은 시간 동안에는 도덕을 완벽하게 실천할 수도 없고, 보상을 모두 받을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이어져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영혼 불멸을 요청해야 합니다. 둘째는 신의 존재를 요청해야 합니다. 착한 사람에게 정확히 비례하는 행복을 배분해 줄 수 있는 전지전능하고 정의로운 심판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한 존재를  불러 와야 합니다. 그 존재가 바로 신(God)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에서 인간의 머리로는 신을 증명할 수 없다며 종교계를 박살 냈었습니다. 그런데 <실천이성비판>에 와서는 도덕을 완성하기 위해 스스로 신의 존재를 다시 불러온 것입니다. 다만, 이때의 신은 성당에 가서 복을 빌고 소원을 들어주는 기복 신앙의 신이 아닙니다. 오직 도덕법칙의 궁극적인 완성을 보증하기 위해 인간의 실천 이성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낸 가장 정의롭고 숭고한 보증 수표와 같은 심판관입니다.

현재의 신, 내 소원을 들어주는 마술사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종교의 신은 자판기나 해결사와 비슷합니다. 이 것도 칸트의 생각입니다.  신이시여, 우리 아들 대학 붙게 해주세요. 신이시여, 이번에 아파트값 오르게 해주세요. 기도를 하고, 헌금을 내고, 제사를 지내면 대가로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신입니다. 칸트는 이런 식의 종교를 혐오했습니다. 칸트의 눈에 이것은 숭고한 신앙이 아니라, 신과 인간이 거래를 하는 얄팍한 장사꾼 마인드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신, 세상의 장부를 정산하는 심판관

반면 칸트가 부활시킨 신은 철저하게 도덕을 완성하기 위한 존재입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 아니라, 우주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최고의 심판관이라고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평생 남을 속이고 법을 교묘하게 피해 가며 수백억을 벌어 호화롭게 살다 죽은 사기꾼이 있습니다. 반면에 평생 남을 돕고 정직하게 살았지만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 억울하게 죽은 선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서는 사기꾼도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성)은 이런 상황을 보고 분노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이건 말도 안 돼! 우주의 정의가 살아있다면, 착하게 산 사람이 사기꾼보다 더 행복해져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습니다. 절대로 맞는 말씀입니다. 칸트는 착한 사람이 합당한 행복을 누리는 것을 완벽한 상태, 즉 최고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완벽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거봐, 착하게 살아봤자 소용없어라고 포기해야 할까요? 칸트는 여기서 특유의 고집을 부립니다. "현실에서 정의가 안 지켜진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죽은 뒤에라도 이 불공평한 장부를 1원짜리 하나까지 완벽하게 정산해 줄 절대적인 판사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해! 안 그러면 우리가 뼈 빠지게 도덕을 지키며 착하게 살 이유가 없어지잖아!"

신이 있어서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종교가 신이 무서우니까, 또는 천국에 가고 싶으니까 착하게 살자 라고 한다면, 칸트는 우리가 끝까지 착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억울함을 나중에라도 완벽하게 갚아줄 정의로운 신이 있다고 강력하게 믿자, 강력하게 요청하자로 순서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묵묵히 도덕법칙을 지키며 험난한 길을 걸어갈 때, 결국 우주의 끝에는 자신의 선한 행동을 완벽하게 보상해 줄 정의로운 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든든한 믿음이 있어야만 인간은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 칸트의 생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원을 들어주는 기복 신앙의 신과 칸트가 말한 도덕을 위한 완전한 심판관으로서의 신이 가지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칸트가 설명하는 기복 신앙의 신과 도덕을 위한 신의 차이를 알겠습니까? 기복신앙의 신은 거래의 대상입니다. 잘되게 해주세요. 합격하게 해주세요.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 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신에게 비는 데, 이때의 신이 기복신앙의 신을 말합니다. 신은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이며, 세상의 도덕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신입니다. 이 신은 내가 원하는 것 을 중심에 둔 신입니다.

깊고 고요한 영혼의 바다, 진정한 인간 이해의 완성

칸트는 진정한 행복의 주도권을 외부 환경이 아닌 자신의 내면으로 가져왔습니다. 행복은 운이 좋아 밖에서 주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마음속의 치열한 도덕적 투쟁을 거쳐, 스스로 떳떳함을 증명해 낸 자만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왕좌가 곧 행복입니다. 이런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욕망과 싸워야 하고, 때로는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칸트가 매일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서재에 앉아 창밖을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은 자신의 도덕적 의무를 다했다는 숭고한 자긍심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칸트에게 도덕법칙을 지키는 삶이란 그 자체로 세속적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행복을 누릴 자격을 갖추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칸트는 이처럼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덕을 갖춘 사람이 그에 합당한 행복을 누리는 상태를 최고선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도덕적인 사람이 반드시 행복해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따라서 칸트는 덕과 행복을 일치시켜 줄 도덕적 심판자로서 신의 존재를 요청한 것입니다.

칸트는 유한한 인간은 이승의 삶만으로는 결코 완전한 도덕성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끊임없이 도덕적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영혼 불멸 역시 요청하게 됩니다. 즉, 칸트가 그리는 세계는 단순히 사후의 보상을 바라는 종교적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실천이성이 최고선을 달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신과 영혼 불멸을 상정해야만 하는 도덕적 세계인 것입니다.

다음 글은 칸트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하는 행복 메시지입니다. 그는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로 행복을 전해 줄까요. 다음에는 행복에 관한 엄숙하고 깐깐한 그의 예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바로가기:칸트의 생애와 시대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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