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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철학의 황제 헤겔의 삶(1)

by 행복 리부트 2026. 3. 19.

칸트가 서재에서 이성의 한계를 말하고 있던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인류 역사를 뒤바꿀 거대한 사건이 터집니다. 바로 프랑스 대혁명(1789)입니다. 왕의 목이 단두대에서 잘리고,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는 민중의 함성이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습니다.

당시 이웃 나라 독일(프로이센 등)의 젊은이들은 혁명의 불꽃을 보며 열광했습니다. 1770년 슈투트가르트의 평범한 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역시 피 끓는 청년 중 한 명이었습니다.

헤겔은 목사가 되기 위해 튀빙겐 신학교에 입학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의 기숙사 방입니다. 방에는 훗날 독일 문학과 철학을 뒤집어 놓을 세 명의 천재가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한 명은 독일 낭만주의 최고의 시인이 되는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 1770 ~1843), 또 한 명은 칸트를 뛰어넘은 천재 철학자 셸링(Joseph Schelling, 1775~1854), 그리고 헤겔이었습니다.

 

세 청년은 밤마다 와인을 마시며 프랑스 대혁명을 찬양했습니다. 심지어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가 들판에 자유의 나무를 심고 프랑스 국가인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피 끓는 청춘들의 뜨거운 결의였습니다.

찌질했던 무명 시절

하지만 졸업 후 세 친구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룸메이트였던 셸링은 불과 23살의 나이에 예나 대학의 정교수가 됩니다. 시인 횔덜린 역시 아름다운 시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반면 헤겔은 어땠을까요?

 

그는 신학교 시절부터 말주변이 없고 둔해서 친구들에게 늙은이라고 놀림을 받았습니다. 성적도 그저 그랬습니다. 신학교 졸업장에는 신학에는 재능이 없고, 철학은 아예 모름이라는 굴욕적인 평가가 적혀 있었습니다.

천재 친구들이 승승장구할 때, 헤겔은 스위스 베른과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전전하며 귀족 집안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주 가정교사(Hofmeister)를 했습니다. 남의 집 눈치를 보며 푼돈을 버는 처지였습니다. 서른 살이 다 되어서야 아버지의 유산을 조금 물려받은 헤겔은, 잘나가는 친구 셸링의 도움을 받아 겨우 예나 대학의 시간강사(사강사) 자리를 얻습니다.

 

하지만 그의 강의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칸트나 쇼펜하우어와 달리 헤겔은 말을 지독하게 못 했습니다. 더듬거리고, 문장이 꼬이고,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죠. 학생들은 그의 강의를 외면했고, 강의가 줄어 들며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인물의 고달픈 무명 시절이었습니다.

대포 소리 속에서 완성한 대작

1806년, 헤겔의 나이 36세일 때, 그의 인생과 유럽의 운명을 바꿀 거대한 사건이 예나 대학을 덮칩니다.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군대를 이끌고 독일을 침공한 것입니다. 유명한 예나 전투(Battle of Jena–Auerstedt, 1806)입니다. 대포 소리가 도시를 뒤흔들고, 사람들은 피난 보따리를 싸서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예나 대학도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한 아수라장 속에서, 헤겔은 하숙집 방에 틀어박혀 자신의 첫 번째 위대한 걸작이자 서양 철학사의 바이블이 될 <정신현상학, 1807>의 마지막 원고를 미친 듯이 써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원고를 모두 쓰고 창밖을 내다보던 헤겔은 엄청난 광경을 목격합니다. 백마를 탄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예나 시내로 입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시대의 왕정을 무너뜨리고, 프랑스 대혁명의 위대한 이념인 자유와 이성을 전 유럽에 퍼뜨리는 살아있는 영웅의 모습에 헤겔은 감격에 겨워 친구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는 오늘 황제인 세계 정신(Weltgeist)이 말을 타고 시내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네. 한 점에 집중되어 있으면서도 온 세상을 지배하는 그 위대한 개인을 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었다네." 헤겔에게 나폴레옹은 무시할 정복자가 아니었습니다.

 

우주의 위대한 이성, 즉 절대 정신이 역사를 진보시키기 위해 인간의 육신을 빌려 나타난 화신(化身)이었습니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찌질했던 무명 강사는 비로소 역사의 목적을 깨닫고 위대한 철학자로 다시 태어 납니다.

신문 편집장과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정신현상학>이라는 엄청난 책을 냈지만 헤겔의 현실은 시궁창이었습니다. 전쟁으로 대학이 문을 닫아 실업자가 된 데다, 사귀던 하숙집 여주인과의 사이에서 사생아까지 태어났습니다. 헤겔은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철학을 잠시 접어둡니다. 그는 밤베르크라는 도시로 가서 신문 편집장으로 일했습니다. 매일 들어오는 전쟁 뉴스와 정치 기사를 다듬으며 1년을 버텼습니다.

 

이후에는 뉘른베르크로 가서 무려 8년 동안이나 고등학교인 김나지움의 교장 선생님으로 일했습니다. 우리는 철학자라고 하면 늘 골방에서 고상한 생각만 할 것 같지만 헤겔은 달랐습니다. 깐깐한 학부모들을 상대하고, 학생들의 시간표를 짜고, 교육청의 예산을 따내는 지극히 현실적인 일들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심지어 41세라는 늦은 나이에 22살이나 어린 귀족 집안의 아가씨 마리 폰 투허와 결혼하여 가정도 꾸렸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힘든 사회생활은 헤겔의 철학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평생 유산으로 먹고살며 방구석에서 세상을 비관할 때, 헤겔은 세상의 진흙탕 속을 뒹굴며 모순투성이 현실 속에 바로 진리가 있다는 자신의 변증법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베를린의 황제에 오르다

고등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도 밤잠을 줄여가며 논리학 등 두꺼운 철학 책을 꾸준히 펴낸 헤겔은, 서서히 독일 지성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818년, 48세의 나이에 마침내 독일 최고의 명문인 베를린 대학교의 정교수로 부름을 받습니다. 찌질했던 늙은이가 20년의 눈물겨운 무명 생활을 청산하고, 독일 철학의 심장부에 입성한 것입니다.

베를린에서의 헤겔은 그야말로 철학계의 아이돌이자 교황이었습니다. 그의 강의실은 수백 명의 학생, 심지어 정부 관료와 장군들까지 몰려와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더듬거리는 그의 기괴한 말투조차 깊은 진리를 짜내기 위한 거룩한 몸부림으로 칭송받았습니다. 프로이센 정부는 그를 국가의 공식 철학자로 우대했습니다.

이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바로 쇼펜하우어의 도발입니다. 새파랗게 젊은 강사 쇼펜하우어가 나의 진짜 철학을 보여주겠다며 감히 헤겔의 강의 시간과 똑같은 시간에 자신의 강의를 개설한 사건 말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헤겔의 강의실은 300명이 꽉 찼고, 쇼펜하우어의 강의실은 파리만 날리다 폐강되었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헤겔은 그때 쇼펜하우어라는 강사가 자기한테 싸움을 걸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코끼리는 발밑에서 개미가 화를 낸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니까요. 헤겔은 이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권력이었습니다.

콜레라와 함께 떠난 거인

권력의 정점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노년을 보내던 1831년 가을, 베를린에 무시무시한 전염병인 콜레라가 덮칩니다. 쇼펜하우어는 기겁하며 짐을 싸서 도망쳤지만 헤겔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총장으로 있는 대학과 학생들을 버릴 수 없다며 베를린에 남았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했습니다. 

 

세계 정신을 부르짖던 위대한 철학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세균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감염된 지 불과 며칠 만인 1831년 11월 14일, 헤겔은 61세의 나이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허망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평생 존경했던 철학자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의 무덤 바로 옆에 그의 시신이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헤겔 철학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킵니다. 그의 제자들은 크게 두 파로 나뉘어 싸웠습니다. 한쪽은 헤겔의 철학을 이용해 프로이센 정부와 기독교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우파 헤겔주의자들이었습니다. 다른 한쪽은 헤겔의 변증법, 즉 부정과 투쟁의 철학을 이용해 낡은 사회를 뒤엎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좌파 헤겔주의자들이었습니다.

좌파 헤겔주의자 그룹에서 훗날 전 세계의 절반을 공산주의 혁명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게 될 무시무시한 청년이 튀어나옵니다. 바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입니다.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고독을 예찬했던 쇼펜하우어와 달리, 흙먼지 날리는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역사와 국가를 논했던 헤겔은 죽어서도 현대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물줄기를 둘로 쪼개버린, 실로 막강하고 대단한 철학의 황제였습니다. 다음 편은 헤겔 철학의 핵심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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