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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적 배경과 삶(1)

by 행복 리부트 2025. 10. 22.


새로운 제국의 여명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384 BC ~ 322 BC)가 살았던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는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활동했던 아테네의 황금기는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도시국가, 즉 '폴리스(polis)'들 간의 끊임없는 전쟁(펠로폰네소스 전쟁 등)은 그리스  전체를 쇠약하게 만들었다.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며 공동체의 미덕을 논하던 폴리스의 이상은 힘을 잃고, 정치적 혼란과 냉소주의가 퍼져나갔다. 바로 이 힘의 공백을 뚫고 북방의 '야만인'이라 여겨졌던 마케도니아 왕국이 거대한 폭풍처럼 일어섰다. 필리포스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그리스 세계를 정복하고, 나아가 페르시아를 무너뜨리며 동서양에 걸친 거대한 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했다. 이러한 격변의 시대는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공동체(폴리스)가 흔들릴 때, 개인은 어떻게 좋은 삶을 살 수 있는가?" "이상적인 국가란 어떤 모습이며, 그 안에서 인간의 행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체계적이고 현실적인 대답이었다. 그는 몰락해가는 폴리스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떠오르는 거대 제국의 황제를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당시의 한복판에서 인간 행복의 길을 탐구했다.

알렉산더 대왕

 

플라톤 아카데미의 이단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북부의 작은 도시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궁정 의사였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인체를 해부하고 자연 현상을 관찰하는 경험주의적, 과학적 사고방식을 갖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17세가 되던 해, 그는 학문의 중심지인 아테네로 유학을 떠나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메이아(Akademeia)'에 입학했다. 그는 순식간에 두각을 나타내며, 스승 플라톤으로부터 아카데미의 정신이라 불릴 만큼 총애받는 제자가 되었다. 그는 무려 20년 동안 플라톤의 곁에서 배우고 토론하며 자신의 철학적 기틀을 닦았다.

하지만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제자가 아니었다. 그는 플라톤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동시에,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였다. 스승 플라톤이 우리의 감각 세계 너머에 이데아라는 영원불변한 참된 세계가 있다고 주장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관찰을 중시했다. 라파엘로의 명화 '아테네 학당'을 보면, 중앙에 선 두 철학자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며 이상 세계를 이야기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며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 세계를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은 소중한 친구이지만, 진리는 더 소중한 친구다라고 말하며, 스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철학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이데아라는 신비로운 세계 대신, 우리의 경험 속에서 행복의 원리를 찾고자 했다.

 

알렉산더를 가르치다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세상을 떠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나 소아시아와 레스보스 섬 등지를 여행한다. 

어린 알렉산더를 지도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 시기에 그는 수많은 동식물을 관찰하고 해부하며 방대한 생물학을 연구했다. 그는 바다 생물의 생태를 관찰하며 그 경이로움에  감탄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철학이 '목적론적 세계관', 즉 세상 모든 것에는 고유한 목적(텔로스, telos)이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343년, 그의 인생에 또 다른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온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가 그에게 아들 알렉산더의 가정교사가 되어달라고 정중히 요청한 것이다. 당시 13세였던 알렉산더는 훗날 동서양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인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약 3년간 이 야심만만한 소년에게 수사학, 정치학, 윤리학, 그리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르쳤다. 세계 최고의 지성과 세계 최고의 정복자가 될  소년의 만남은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에게 절제와 중용의 미덕을 가르쳤을 것이다. 이상적인 통치자는 힘만으로 다스리는 폭군이 아니라, 덕을 통해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여야 한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하지만 제자 알렉산더의 길은 스승의 가르침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끝없는 정복욕에 불타올랐고, 자신을 신격화하며 동방의 전제 군주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이 실패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정복지에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고, 원정길에 수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데려가 동식물과 지리에 대한 탐사를 계속하게 한 것은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 스승은 앎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했고, 제자는 힘을 통해 세계를 정복하려 했다.

 

리케이온을 세우다

알렉산더가 동방 원정의 길에 오른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원전 335년, 그는 자신의 학교인 '리케이온(Lykeion)'을 설립한다. 리케이온은 스승의 학교였던 아카데메이아와는 성격이 달랐다. 아카데메이아가 수학과 관념론적 토론을 중시했다면, 리케이온은 동식물 표본과 각국의 헌법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경험적, 실증적 연구의 중심지였다.

리케이온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함께 리케이온의 산책로를 거닐면서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의 학파는 '소요학파(逍遙學派)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윤리학, 정치학, 형이상학, 논리학, 수사학, 시학뿐만 아니라 생물학, 물리학,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거의 모든 지식 분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저작들은 이후 서양 학문 전체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말 그대로 '한 사람의 대학'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평온하지 못했다. 기원전 323년, 위대한 정복자였던 제자 알렉산더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아테네에서는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대한 반감이 거세게 타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의 스승이었다는 이유로 '신을 모독했다'는 불경죄로 고발당했다. 이는 과거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바로 그 죄명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그는 "아테네인들이 철학에 두 번 죄를 짓게 할 수는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아테네를 떠나 에우보이아 섬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이듬해, 위장병으로 62년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인간 이성의 힘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분류하려 했던 위대한 탐구자였다.

 


시대를 비추는 거울

 

에우보이아 섬으로 피신한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를 향한 평가는 한 시대에 고정되지 않는다. 그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하며 각 시대의 정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았다. 그는 살아생전부터 존경과 의심을 한 몸에 받았다. 사후에는 '철학의 제왕'으로 군림하다가 '타도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오늘날에는 '영원한 스승'으로 다시금 우리 곁에 자리하고 있다. 당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으로부터 '아카데미의 정신'이라 불릴 만큼 최고의 천재로 인정받았다. 동시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라는 배경은 그에게 막강한 명예와 함께 정치적 위험을 안겨주었다. 아테네인들에게 그는 위대한 지성이었지만, 잠재적인 정적(政敵) 마케도니아와 연결된 위험인물이기도 했다. 결국 '신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고발되어 아테네를 떠나야 했던 그의 말년은, 동시대가 그에게 보냈던 경외와 불안이 뒤섞인 복합적인 시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사후, 유럽이 지적 암흑기에 접어들었을 때 그의 철학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되살린 것은 다름 아닌 이슬람 세계였다. 이븐 시나, 이븐 루시드와 같은 위대한 이슬람 학자들은 그를 단순히 그 철학자라 칭하며 절대적인 존경을 보냈고, 그의 저작을 보존하고 깊이 연구했다. 이들의 노력은 훗날 서양 지성사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화려하게 부활하는 결정적인 다리가 되었다.

 

중세 유럽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의 철학을 기독교 신학과 종합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상은 역사상 최고점에 도달했다. 

그는 모든 학문의 절대적 권위이자 '철학의 교황'으로 군림했으며, 그의 말은 성경 다음가는 진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과학 혁명의 시대가 도래하며 상황은 다시 반전되었다. 갈릴레오를 비롯한 근대 과학자들은 그의 자연과학 이론에 도전했고, 그는 극복해야 할 '낡은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이상 오류 없는 절대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과학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가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미학 등 서양 학문의 거의 모든 길을 처음 닦은 만학의 아버지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특히 그의 '덕 윤리'는 효율과 성과만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며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대를 넘어 끊임없이 우리와 대화하는, 영원한 스승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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