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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플라톤 철학의 핵심(2)

by 행복 리부트 2025. 10. 22.


1. 소크라테스의 그림자, 철학의 설계자


서양 철학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모든 길은 플라톤(Platon, 428/427 BC ~ 348/347 BC)으로 통한다. 어떤 철학자는 그의 사상을 계승했고 어떤 철학자는 그의 사상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거대한 그림자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독배를 마시는 스승 소크라테스를 바라보는 플라톤

 

20세기의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서양 철학사 2,500년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했을 정도다. 스승 소크라테스가 철학이라는 땅에 깊은 질문의 씨앗을 뿌렸다면, 제자 플라톤은 그 위에 ‘이데아’라는 기둥을 세우고, ‘국가’라는 지붕을 얹어 철학이라는 거대한 궁전을 설계한 최초의 건축가였다. 그가 이 위대한 건축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깊은 상처와 충격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던 스승 소크라테스!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롭고 정의로운 그 사람이, 아테네 시민들의 투표에 의해 사형을 언도 받는 모습을 그는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이 사건은 젊은 플라톤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진리가 어떻게 다수의 무지와 편견에 의해 처형당할 수 있는가? 그는 깨달았다. 소피스트들의 궤변처럼 진리가 상대적인 것이라면, 정의는 결국 힘센 자의 목소리가 될 뿐이다. 

 

변덕스러운 여론이나 감각적 경험에도 흔들리지 않는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진리의 토대를 마련해야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소크라테스가 길 위에서 대화를 통해 철학을 실천했다면,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라는 학교를 세우고 수많은 저작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구축했다. 그는 스승의 입을 빌려, 스승이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 어쩌면 스승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진리의 세계를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그가 설계한 장엄한 철학의 궁전으로 들어가 그 핵심 설계도인 ‘이데아론’과 그 설계도를 따라 지어진 ‘국가론’을 탐험해 볼 것이다.

 

2. 이데아의 세계 

플라톤 철학의 심장이자 모든 논의의 출발점은 바로 이데아혹은 형상이라고 불리는 개념이다.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플라톤은 우리에게 세상을 두 개로 나누어 보라고 제안한다. 하나는 우리의 오감을 통해 경험하는 ‘현실(감각)의 세계’다. 이곳은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겨나고, 또 사라지는 불완전한 세계다. 지금 내 눈앞에 피어 있는 장미꽃은 내일이면 시들 것이다. 우리가 목격한 정의로운 행동은 시간이 지나면 잊힐 것이다. 이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앎은, 기껏해야 불확실한 의견이나 추측에 불과하다. 그것은 참된 지식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참된 지식의 대상이 되는 ‘진짜’는 어디에 있는가? 플라톤은 바로 이 감각 세계 너머에, 영원하고 불변하는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이데아의 세계는 오직 순수한 이성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완전한 세계다. 그곳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의 완벽한 원형, 즉 ‘본질’이 되는 이데아들이 존재한다.예를 들어보자. 이 세상에는 수많은 ‘침대’들이 있다. 나무로 만든 침대, 쇠로 만든 침대, 크고 작은 각양각색의 침대들이 있다. 이 침대들은 모두 낡고 부서지기 마련인 불완전한 ‘현실의 침대’들이다. 하지만 이 모든 침대를 ‘침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침대’의 완벽한 본질, 즉 ‘침대 그 자체’의 이데아가 저 너머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목수는 이 ‘침대의 이데아’를 어렴풋이 파악하여 현실 세계에 그 복제품을 만들어낸다. 화가는 그 목수가 만든 복제품을 보고 다시 캔버스에 그 그림자를 그려낸다. 따라서 화가의 그림은 ‘복제품의 복제품’에 불과하며, 진짜 실재인 이데아로부터 두 단계나 멀어진 가장 흐릿한 존재가 된다. 이는 ‘아름다움’, ‘정의’, ‘용기’ 같은 추상적인 가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아름다움 자체(미의 이데아)’의 불완전한 복제품에 불과하다. 

 

철학자의 임무는 이처럼 혼란스러운 현실 세계의 그림자들을 넘어, 사물의 영원한 본질인 이데아의 세계를 직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수많은 이데아 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있는 최고의 이데아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선의 이데아다.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했다. 현실 세계의 태양이 우리 눈에 빛을 주어 만물을 볼 수 있게 하고, 만물에 생명을 주어 자라나게 한다.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선의 이데아’는 현실 세계의 태양처럼, 우리 이성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다른 모든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선의 이데아’는 모든 이데아에 존재의 근거를 마련해준다. 그것은 모든 앎과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플라톤 철학의 신(神)과도 같은 존재였다.

 

3. 동굴의 비유 

이처럼 세상을 두 개로 나누는 플라톤의 생각은 그의 가장 유명한 이야기인 ‘동굴의 비유’를 통해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하게 펼쳐진다. 이 비유는 그의 이데아론과 교육론, 그리고 정치철학까지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최고의 알레고리다.이야기는 지하 동굴 속에서  시작된다. 한 무리의 죄수들이 태어날 때부터 벽만 바라보도록 사슬에 묶여 있다. 그들 뒤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고, 그 불과 죄수들  사이로 어떤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사물 모형을 들고 지나간다. 죄수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벽에 비친 그 사물들의 그림자뿐이다.  그들은 평생 그림자 외에는 본 것이 없기에, 그 흔들리는 그림자들이야말로 세상의 유일한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다. 어느  날, 한 죄수가 우연히 사슬에서 풀려나게 된다. 그는 강제로 몸을 돌려 뒤를 보게 된다. 평생 처음 보는 불빛에 그의 눈은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 그는 여전히 벽에 비친 그림자가 불빛 앞의 사물 모형보다 더 진짜 같다고 생각한다. 이제 누군가 그를 거칠게 끌고 동굴 밖, 태양이 작열하는 세상으로 나간다. 그는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눈은 서서히 빛에 익숙해진다. 처음에는 물에 비친 그림자나 사물의 그림자를 보게 되고(수학적 인식 단계), 그다음에는 실물들을 직접 보게 되며(이데아 인식 단계), 마침내 저 하늘의 태양, 즉 ‘선의 이데아’를 직접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평생을 그림자의 세계, 즉 거짓과 무지 속에서 살아왔음을 깨닫고 환희에 휩싸인다.

 

진리를 깨달은 이 철학자는 동굴 속에 남아있는 다른 죄수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는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다시 어두운 동굴 속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빛의 세계에 익숙해진 그의 눈은 이제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는 비틀거리고 더듬거린다. 
동굴 속 죄수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비웃는다. “저 자는 동굴 밖에 나갔다 오더니 눈이 병신이 되었구나!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주 해로운 일이야.” 그들은 철학자의 말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약 누군가 자신들을 풀어주려 한다면 그를 죽이려 들 것이다.

이 비유가 상징하는 바는 명확하다. 동굴은 우리가 사는 ‘감각의 세계’이고, 죄수들은 진리를 보지 못하는 우리 보통 사람들이다. 
벽에 비친 그림자는 우리의 불확실한 ‘억견’이다.


참고: 플라톤에게 있어 억견(Doxa)참된 지식과는 다른 의견이다. 억견은 감각적 경험에 바탕을 둔 불확실한 앎을 의미했다. 이는 변하는 현상계에 대한 것이었기에 참된 지식이 될 수 없다. 억견은 우리가 오감으로 접하는 현실 세계에 대한 것이며, 이 세계는 영원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앎 또한 완전하지 않고, 단지 불확실한 의견일 뿐이다. 억견은 진리 자체가 아닌, 그럴듯해 보이는 믿음이다.

플라톤은 앎을 억견과 에피스테메( (Episteme, 참된 지식)로 나누었다. 억견은 현상계에 대한 불확실한 의견이다. 반면 에피스테메는 순수 이성으로 파악하는 이데아계에 대한 참되고 변치 않는 지식이다. 동굴의 비유는 억견을 잘 설명한다. 동굴 속 죄수들이 벽에 비친 그림자를 실재라 믿는 것이 바로 억견이다. 철학자는 동굴을 벗어나 이데아를 직시함으로써 에피스테메에 도달해야 한다고 플라톤은 보았다.



동굴 밖으로의 고통스러운 여정은 ‘철학적 교육’의 과정이며, 태양의 세계는 바로 ‘이데아의 세계’다. 그리고 동굴로 돌아온 철학자가 겪는 수모와 죽음의 위협은, 진리를 말하다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죽임을 당한 ‘소크라테스’의 운명을 암시한다. 플라톤은 이 비유를 통해, 철학이란 안락한 그림자의 세계를 떠나 고통스러운 진실을 마주하고, 마침내 그 진리를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영혼의 장엄한 여정임을 보여주었다.

 

4. 이상 국가 

플라톤의 관심은 단지 형이상학적인 세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해, 철학이 현실 정치와 분리될 수 없음을 절감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

 

그의 대화편 『국가』는 바로 이 문제, 즉 ‘정의로운 국가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그의 평생의 고민이 담긴 역작이다. 그리고 그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아주 독창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바로 국가를 거울삼아 개인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에게 정의로운 국가는 정의로운 개인의 영혼이 확대된 모습과 같았다. 그는 먼저 우리의 영혼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먼저 이성(Logos)이다. 우리 영혼의 가장 높은 부분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역할을 한다. 마차를 모는 마부에 비유되며, 그 덕은 지혜이다. 둘째는 기개이다. 명예와 용기를 사랑하는 부분이다. 마부의 말을 따르는 혈통 좋은 흰 말에 해당한다. 그 덕은 용기이다. 셋째는 욕망이다. 음식, 잠, 성욕, 재물 등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가장 낮은 부분이다. 제멋대로 날뛰려는 검은 말에 비유되며, 이성이 잘 통제할 때 절제의 덕을 갖는다. 개인의 영혼 속에서 정의란, 이 세 부분이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이성이 기개의 도움을 받아 욕망을 잘 통제하고 다스릴 때, 그 영혼은 비로소 정의롭고 행복한 상태(에우다이모니아)에 이르게 된다.

 

플라톤은 이 영혼의 삼분설을 국가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가 꿈꾼 이상 국가는 세 계급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통치자 계급(철인왕)이다. 영혼의 ‘이성’에 해당한다.  이들은 동굴 밖 태양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와 선의 이데아를 인식한 철학자들이다. 지혜를 갖춘  이들이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는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는 수호자 계급(군인)이다. 영혼의 ‘기개’에 해당한다. 용맹하고 강인한 이들은 통치자의 명령에 따라 국가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방어하고 내부의 질서를 유지한다. 셋째는 생산자 계급(농민, 상인, 수공업자)이다. 영혼의 ‘욕망’에 해당한다. 이들은 각자의 기술로 국가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며, 절제의 덕을 발휘하여 자신의  욕구를 통제해야 한다.

제 멋대로 날뛰는 검은 말, 욕망

 

국가에서의 ‘정의’란, 이 세 계급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기능을 탁월하게 수행하며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의사가 정치를 하려 하거나 군인이 농사를 지으려 할 때 국가는 혼란에 빠진다. 마찬가지로, 욕망이 이성을 지배하려 할 때 개인의 삶은 파멸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완벽한 조화를 위해, 플라톤은 통치자 계급과 수호자 계급에게는 사유재산과 가족을 금지하는 파격적인 제도를 제안한다. 재산과 가족에 대한 사사로운 욕심이 국가 전체의 이익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또한, 시민들의 영혼을 타락시킬 수 있는 특정 종류의 예술과 음악을 검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이상 국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비민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와 아테네 민주정의 중우정치(衆愚政治)를 극복하고,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정의’에 기반한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를 세우려는 치열한 철학적 노력의 산물이었다.

 

5. 철학자의 의무

결국 플라톤의 철학은 하나의 거대한 원을 그린다. 그것은 현실 세계의 불완전함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소크라테스의 죽음), 영원불변의 이데아 세계를 정립하고, 동굴의 비유를 통해 진리를 인식하는 길을 제시한 뒤, 마침내 그 진리의 원칙을 현실의 개인과 국가에 적용하여 이상적인 삶의 청사진을 완성하는 장대한 여정이다. 그의 철학은 아름답고 숭고하지만, 때로는 차갑고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던진 질문들은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무엇이 진짜 실재이고 무엇이 그림자인가? 진정한 앎이란 무엇인가? 정의로운 삶이란 어떤 것이며, 정의로운 사회는 가능한가? 그는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최초로 체계적인 답을 제시하려 했던 위대한 설계자였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그가 지은 이 거대한 궁전 안에서, 때로는 그 방을 아름답게 꾸미고, 때로는 벽을 허물고 다른 방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때로는 그 궁전 자체를 불태우려 시도했던 후대 철학자들의 역사도 있었다. 플라톤은 그렇게, 우리 모두의 사유 속에 영원한 건축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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