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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플라톤이 전하는 행복 메시지(4)

by 행복 리부트 2025. 10. 22.


내 이름은 플라톤이다. 아테네의 아카데메이아에서 젊은이들과 진리를 논하던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묻지 마라. 나도 모른다. 다만 나는 보고, 듣고, 생각한다. 이것이 2,400년 뒤의 세상이로구나. 너희들의 기술은 놀랍다. 손바닥만 한 판유리 조각(너희는 '스마트폰'이라 부르더군)으로 세상 끝과 소통한다. 밤에도 대낮처럼 빛나는 도시, 하늘을 나는 쇠로 만든 마차.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에 놀라는 플라톤

 

내 스승 소크라테스가 이걸 봤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아마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혼란스럽다. 너희는 그토록 많은 것을 가졌는데, 왜 그토록 불안해 보이는가? 그토록 많은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데 왜 진리에서 더 멀어지는 듯한가? 그토록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데 왜 그토록 외로워 보이는가? 나는 너희를 비난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철학자다. 나의 일은 질문하고 본질을 파고드는 것이다. 너희 세상의 번쩍이는 표면 아래 아주 익숙한 그림자가 보인다. 내가 평생에 걸쳐 이야기했던 바로 그 그림자다. 이제 그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겠다. 너희의 언어로 너희의 문제에 맞춰서 말이다.

 

새로운 동굴

너희는 동굴에 살고 있다. 내가 쓴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를 기억하는가? 죄수들이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그것이 진짜 세상이라고 믿는 이야기. 그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조건에 대한 나의 진단이었다. 그리고 너희는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가장 화려하며, 가장 교묘한 동굴을 만들어 냈다. 그 동굴의 벽은 바로 너희 손에 들린 '스크린'이다. 

스마트폰, 컴퓨터, 텔레비전, 그 빛나는 사각의 벽, 너희는 종일 그 벽만 쳐다본다. 벽에는 온갖 그림자들이 춤을 춘다. 뉴스 헤드라인,  친구들의 완벽한 휴가 사진, 1분짜리 춤 영상, 자극적인 가십, 분노를 유발하는 논쟁, 너희는 그 그림자들을 보고 웃고 울고 분노하고 욕망을 발산한다. 그리고 믿는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누가 그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가?  내 비유 속 '죄수 뒤의 횃불과 길'을 기억하라.

스마트폰으로 소통하는 현대인의 모습

 

그 길 위에서 인형을 들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림자를 만드는 자들이다. 너희 시대의 그림자 술사들은 훨씬 더 교묘하다. 그들은 '알고리즘'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너희가 볼 그림자를 결정한다. 너희가 좋아할 만한 그림자, 너희가 더 오래 쳐다볼 그림자, 너희의 지갑을 열게 할 그림자를 쉴 새 없이 비춰준다. 거대 미디어, 광고 회사, 정치 세력, 심지어는 너희 친구들까지. 모두가 이 거대한 그림자 연극의 배우이자 연출가다.

 

너희는 사슬에 묶여 있다. 동굴의 죄수들은 쇠사슬에 묶여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너희의 사슬은 '좋아요', '알림', '구독'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사슬이다. 새로운 알림이 울릴 때마다 너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즉각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린다. 너희는 그림자를  놓칠까 봐 두려워한다. 세상의 흐름에서 뒤처질까 봐 불안해한다. 너희는 그 사슬을 스스로 원하고 심지어 사랑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너희의 현실이다. 너희는 역사상 가장 안락하고 재미있는 동굴의 죄수들이다.

첫 번째 진리는 이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 내가 동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철학의 시작이자 동굴을 빠져나올 유일한 희망이다. 둘째, 너의 영혼은 교통체증에 갇힌 마차와 같다. 나는 인간의 영혼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을 '영혼의 삼분설'이라 부르더군. 나는 마차를 모는 마부에 비유했다. 마부(이성, Logos)는 마차의 방향을 결정하는 지혜로운 부분이다. 착한 말(기개, Thymos)은 명예와 용기를 사랑하는 고귀한 말이다. 나쁜 말(욕망, Eros)은 먹고, 마시고, 탐하는 본능적인 말이다.  훌륭한 삶이란, 마부인 '이성'이 '기개'의 도움을 받아 '욕망'이라는 말을 잘 다스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너희 영혼의 마차를 한번 보자. 그것은 최악의 교통체증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다. '욕망'이라는 말은 고삐가 풀렸다. 

너희 세상은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긴다.'더 빨리, 더 많이, 더 새롭게!' 스크린 속 그림자들은 너희에게 속삭인다. '이걸 사면 행복해져', '이걸 먹으면 즐거워져', '남들처럼 가져야 해'. 욕망의 말은 이리저리 날뛰며 마차를 진흙탕으로 끌고 간다.  너희는 그것을 '소비' 혹은 '플렉스'라고 부르며 착한 말이 달리는 것이라 착각한다.

 

'기개'라는 말은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본래 명예를 추구해야 할 이 말은, 이제 '좋아요'와 '관심'을 구걸하고 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한 용기가 아니라,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인정 욕구'에 목을 맨다. 혹은 온라인에서 익명 뒤에 숨어 정의로운 분노가  아닌 배설적인 분노를 표출하며 자신이 용감하다고 착각한다. 고귀한 말은 길들여지지 않은 조랑말이 되어버렸다.

 

'이성'이라는 마부는 지쳐서 졸고 있다. 두 마리의 말이 제멋대로 날뛰는 동안, 마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너무 많은 그림자,  너무 많은 소음, 너무 많은 선택지 앞에서 이성은 마비되었다. 깊이 사유하고 올바른 길을 찾기보다, 당장 욕망의 말이 원하는 곳으로 고삐를 넘겨주는 편이 쉽기 때문이다. 이성은 '가성비'와 '효율'이라는 이름의 졸음운전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부가 깨어나야

너의 이성을 깨워라. 스크린을 끄고 소음을 차단하라. 그리고 너의 영혼에 질문을 던져라.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를 이끄는 것은 이성인가, 욕망인가, 아니면 타인의 시선인가?" 영혼의 운전대를 다시 잡아야 한다. 그것이 너희가 겪는 혼란의 핵심이다.
나는 '국가'에서 이상적인 통치자는 '철인(哲人)', 즉 철학자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혼의 운전대를 잡지 못한 마부

 

진정한 앎, 즉 '이데아(Idea)'의 세계를 본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부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선(善)을 위해 통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너희는 아마 비웃을 것이다. "뜬구름 잡는 소리." "현실을 모르는군." 그래, 너희의 '민주주의'라는 것을 잘 보았다. 시민들이 직접 지도자를 뽑는 제도, 아테네에서도 비슷한 것을 시도했었지. 그리고 그 결과, 내 스승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당했다. 너희의 민주주의는 훨씬 더 거대하고 위험한 게임이 되었다. 너희는 국가의 방향을 결정할 가장 중요한 사람을 어떻게 뽑는가? 그가 '진리'를 아는가? 아니. 그가 '선'을 추구하는가? 아니. 그가 '그림자 놀이'를 가장 잘하는가? 그렇다. 너희의 지도자들은 철학자가 아니다. 그들은 최고의 그림자 술사다. 그들은 너희의 귀에 가장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법을 안다. 

너희의 분노를 자극해 표를 얻는 법을 안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구호로 바꾸는 법을 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이 아닌, 너희가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라는 그림자를 보여주는 데 통달했다.

 

너희는 배를 고치는 기술자를 뽑을 때, 가장 말 잘하는 사람을 뽑는가? 아니다. 실력 있는 사람을 뽑는다. 그런데 왜 국가라는 거대한 배의 선장을 뽑을 때는, 가장 그럴듯한 그림자를 보여주는 사람을 뽑는가? 이것은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그런 지도자는 결국 나라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삼거나, 더 큰 혼란으로 이끌 뿐이다. 내가 하려는 말은 독재가 옳다는 뜻이 아니다. 너희 시민들 스스로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도자의 화려한 그림자 뒤에 있는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당장의 이익이라는 약속보다, 공동체 전체의 선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시끄러운 구호보다 조용한 진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시민이  현명해지지 않으면, 국가는 언제나 가장 교활한 그림자 술사의 손에 놀아나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의 모방

나는 예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특히 화가나 시인들을 경계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방의 모방'을 만드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완벽한 '침대의 이데아(본질)'가 있다. 목수는 그 이데아를 모방하여 눈에 보이는  '현실의 침대'를 만든다(1차 모방).  화가는 그 현실의 침대를 보고 '그림 속의 침대'를 그린다(2차 모방). 이것은 진리인 이데아에서  두 단계나 멀어진 희미한 복제품일 뿐이다. 이런 것은 영혼을 진리로 이끌지 못하고 감정만 자극하여 이성을 흐리게 할 뿐이다.

 

이제 너희의 '인스타그램'이라는 것을 보자. 이것은 나의 '모방의 모방' 이론을 증명하는 가장 완벽한 예시다. 완벽한 '행복한 삶의 이데아'가 있다고 치자. 어떤 사람은 그 이데아를 흉내 내어 '행복해 보이는 순간'을 연출한다(예: 비싼 레스토랑에서 억지 미소를 짓는다. 이것이 1차 모방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 올린다(이것이 2차 모방이다). 심지어 '필터'나 '보정'을 통해 그 사진을 더 비현실적으로 꾸민다(이것은 3차 모방이다). 너희는 진리에서 세 걸음이나 떨어진 그 가짜 그림자를 보고 '좋아요'를 누른다.  그리고 그것을 '아름다움' 혹은 '선망하는 삶'이라고 믿는다.

 

너희의 영혼은 진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 기회를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좇게 된다. 진짜 아름다움은 조화, 균형, 덕(德)과 같은 내면의 성질이다. 그것은 필터로 만들 수 없다. '좋아요' 버튼은 진정한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그림자를 진짜라고 믿는가'를 보여주는 숫자일 뿐이다. 다수가 옳다고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는 아니다. 동굴 속 모든 죄수가 그림자가 진짜라고 믿어도, 그것은 여전히 그림자일 뿐이다. 껍데기를 향한 찬사를 멈춰라. 그리고 진짜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라.
조화로운 음악, 논리정연한 수학의 세계, 친구와의 진실한 대화, 불의에 맞서는 용기 있는 행동 속에 진짜 아름다움이 있다.

 

동굴에서 나가는 법

나는 너희 세상의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너희는 빛나는 동굴의 죄수이며, 영혼의 마차는 길을 잃었고, 그림자 술사에게 통치받으며, 가짜 아름다움에 열광하고 있다. 이것이 나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처방은 무엇인가?

동굴에서 탈출하기

 


동굴에서 어떻게 나갈 수 있는가? 그 길은 쉽지 않다. 동굴 밖으로 처음 나간 죄수는 햇빛에 눈이 멀어 고통스러워했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고통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 첫째, 질문을 시작하라(대화법). 스스로 그리고 타인에게 계속 질문하라.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것이 진실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거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토론하라. 승리를 위한 논쟁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공동의 탐험으로서의 대화를 나눠라.

둘째, 보이지 않는 것을 사유하라(이데아를 찾아서). 스크린을 끄고 눈을 감아라. 그리고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생각하라. '완벽한 우정'이란 무엇일까? '진정한 용기'란 어떤 모습일까? '좋은 삶'이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의 본질, 즉 '이데아'를 찾으려 노력할 때 너의 이성은 단련된다.

셋째, 너의 영혼을 돌보라(마부 훈련). 너의 이성이 강한 마부가 되도록 훈련시켜라. 욕망의 말이 날뛸 때는 절제를 가르치고, 기개의 말이 헛된 명예를 좇을 때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라. 이것은 명상, 공부, 반성적 글쓰기와 같은 훈련을 통해 가능하다.

넷째, 햇빛의 고통을 감수하라.  동굴 밖으로 나오는 과정은 외롭고 힘들다. 다른 죄수들은 너를 비웃거나 미쳤다고 할 것이다.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진짜 세상이 있다. 그림자가 아닌 실재가, 허상이 아닌 진리가 있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내 스승께서 남기신 말이다. 너의 삶을 성찰하라. 너의 동굴을 직시하라. 너의 동굴 밖에는 진짜 세상이 있다. 이제, 나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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