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을 부수러 온 사람
내 이름은 나가르주나라 하네. 나는 그대들에게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거나, 신비로운 깨달음을 파는 스승이 아닐세. 나는 그대들이 ‘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부수러 온 사람일세. 그대들은 저마다 ‘세상’이라는 집을 짓고 그 안에 살고 있더군.
‘나는 존재한다’, ‘세상은 존재한다’, ‘행복은 존재하고 불행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단단한 기둥들을 세우고,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벽돌을 쌓아 올렸지. 그리고 그 안락한 집이 바로 ‘현실’이라고 믿으며, 그 집이 무너질까 봐 늘 불안해하는구나. 나는 그대들의 그 집을 철저히 부수러 왔네. 왜냐고? 그대들이 안락한 집이라 믿는 그것은 사실, 그대들을 고통 속에 가두는 감옥이기 때문일세.

그대들은 ‘나의 것’이라 부르는 것들에 너무나 필사적으로 매달리는구나. 나의 돈, 나의 집, 나의 명예, 나의 지위 등, 심지어 눈에 보이지 않는 ‘나의 의견’, ‘나의 신념’, ‘나의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그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고, 남의 것을 부러워하며 괴로워한다. 그 모든 고통은 단 하나의 착각에서 비롯된다. 바로 그대들이 집착하는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實有)’는 믿음. 스스로 힘으로, 변치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그 잘못된 믿음 말일세.
나는 의사와 같네. 병의 근원을 도려내는 의사 말일세. 그대들 마음의 병, 그 고통의 근원은 바로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그 생각의 종양일세. 나는 ‘공(空)’이라는 이름의 예리한 메스를 사용하여, 그대들이 집착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텅 비어 있음을 남김없이 보여주려 하네. 나의 이야기는 아마도 그대들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그대들은 발밑의 땅이 꺼지는 듯한 아찔한 혼란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두려워 말게. 내가 그대들의 집을 부수는 것은, 그대들을 황량한 벌판에 내버려 두기 위함이 아니네. 그 집이 무너진 텅 빈 공터 위에서, 비로소 그대들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춤추게 될 걸세. 모든 것이 텅 비어 있기에, 오히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자, 이제 그대의 메스를 들고, 나와 함께 수술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는가? 우선 그대들이 가장 단단하다고 믿는 기둥, ‘세상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그 믿음부터 함께 부수어 보기로 하지.
공(空)이란
내가 “모든 것은 텅 비어있다(空)”고 말하면, 그대들은 대부분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군. “허무주의 아닌가?” “세상이 텅 비었다니, 내 눈앞에 이렇게 컵이 있고, 책상이 있는데?” “그렇게 아무것도 없다면, 선과 악도 없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는 말인가?” 이런 오해야말로 ‘공’의 가르침을 가장 위험하게 만드는 독(毒)일세. 잘 듣게. 내가 말하는 ‘공’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세. 만약 ‘공’이 그저 없음이라면, 나는 그대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은 자일 뿐이지. 내가 말하는 ‘공(空)’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일세. 조금 더 쉽게 말해볼까? 세상의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만 잠시 존재할 뿐이라는 뜻이네. 이것을 나는 ‘연기(緣起)’라고 부르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는 뜻일세.
자, 그대 눈앞에 있는 컵을 보게나. 그대들은 컵이 원래부터, 스스로, 당연히 거기에 존재한다고 믿는가? 과연 그럴까? 나와 함께 그 컵을 한번 해체해 보세. 이 컵이 존재하려면, 컵을 만든 흙이 있어야 하네. 흙이 컵도 없지. 흙을 빚어 컵의 모양을 만든 도공이 있어야 하네. 도공이 없으면 컵도 없지. 컵을 단단하게 구워낸 불과 가마가 있어야 하네. 불이 없으면 컵도 없지. 컵을 컵이라 부르기로 약속한 그대들의 언어와 개념이 있어야 하네. 그런 약속이 없다면 그저 흙덩어리일 뿐이지. 심지어 이 컵을 바라보는 그대의 눈과 의식이 있어야 하네.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그것이 컵으로서 무슨 의미가 있겠나? 보게나. 컵이라는 존재 안에는 흙, 도공, 불, 언어, 그대 자신 등 온 우주가 들어와 있네. 컵은 수많은 관계와 조건들이 잠시 모여 만들어진 사건일 뿐, 스스로 힘으로 존재하는 단단한 실체가 아닐세. 이처럼 스스로의 성품이 텅 비어 있기에, 나는 ‘자성(自性)이 공(空)하다’고 말하는 것일세.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렇다네. 책상은 나무와 목수와 못이 잠시 만난 것이고, 나라는 존재는 부모님과 음식과 공기와 사회가 잠시 뭉쳐 나타난 현상일 뿐이네. 그 어디에도 이것이 바로 나다! 라고 붙잡을 만한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네.
그러나 ‘공’은 허무주의가 아닐세. 오히려 그 반대일세. 모든 것이 텅 비어 있기에, 즉 모든 것이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기에,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위대한 진리를 보여주지. 모든 것이 텅 비어 있기에, 즉 고정된 실체가 없기에, 변화와 생성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일세. ‘공’은 공터와 같네. 텅 비어 있기에 그 위에서 집을 지을 수도, 밭을 갈 수도, 아이들이 뛰어놀 수도 있는 걸세.
만약 그 공터가 처음부터 단단한 바위로 꽉 차 있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었을 걸세. 이것이 바로 ‘공(空)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以有空義故 一切法得成)’는 나의 가장 중요한 선언일세. 없음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 이것이 바로 ‘공’의 진짜 얼굴이라네.
이제 그 메스는 나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라 말해도, 그대들은 마지막까지 이것 하나만은 굳게 붙잡고 있지. 바로 나라는 존재 말일세. “세상은 텅 비었을지 몰라도, 지금 생각하고 느끼는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것이 그대들이 세운 최후의 보루이자, 가장 견고한 감옥이다. 이제 우리는 이 가장 단단한 요새를 해체할 걸세. 나의 질문에 답해보게나. 그대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대의 몸(肉體)이 나?
그대들은 말하겠지. “나는 이 몸이다.” 과연 그럴까? 그대의 몸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대가 먹은 음식, 마신 물, 들이마신 공기로 이루어져 있지. 그 어느 것 하나 원래부터 나였던 것은 없네. 어제의 그대 몸과 오늘의 그대 몸은 세포 하나까지도 똑같지 않다네. 몸은 그저 수많은 물질이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흐름일 뿐, 고정된 나가 아닐세. 만약 몸이 나라면, 머리카락을 자르고 손톱을 깎아낼 때, 나의 일부를 잘라내는 고통을 느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몸은 나가 아닌 것이지.
그대의 감정(感情)이 나?
그렇다면 기뻐하고 슬퍼하는 그 감정이 나인가? 이것 또한 어불성설이지. 그대들의 감정은 아침저녁으로 수십 번씩 바뀌지 않는가. 기쁨이 나라면, 슬픔이 찾아왔을 때 나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분노가 나라면, 평온함이 찾아왔을 때 나는 죽어버린 것인가? 감정은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과 같을 뿐, 하늘 그 자체가 아닐세.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손님일 뿐, 주인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감정은 나가 아니다.
그대의 생각(思考)이 나?
이것이 가장 교묘한 함정이지. 그대들은 생각하는 나야말로 진짜 나라고 믿는다. 과연 그런가? 그대의 생각 또한 쉴 새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지 않는가? 1분 전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은 다르다. 그 수많은 생각의 파도 중, 어떤 것이 진짜 나라는 파도인가? 생각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건에 따라 저절로 일어나는 것임을 알게 될 걸세. 내가 통제할 수도 없는 이 변화무쌍한 생각을 어찌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생각 또한 나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몸도 감정도 생각도 나가 아니라면, 어쩌면 나는 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켜보는 주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겠지? 그렇다면 그 주인은 어디에 있는가? 몸을 떠나서, 감정을 떠나서, 생각을 떠나서 존재하는 순수한 나를 그대는 단 한 순간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그런 것은 없다네. 주인 없는 소유물이란 없듯이, 몸과 마음을 떠난 나라는 주인 또한 존재하지 않네.
보았는가? 나라는 존재를 찾아 몸과 마음을 샅샅이 해부해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붙잡을 만한 나의 실체는 없었네.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몸과 감정과 생각이 수많은 조건에 따라 잠시 모여 일으키는 현상일 뿐이네. 이것이 바로 나라는 실체는 없다는 무아(無我)의 가르침이며, 이것이야말로 ‘공(空)’의 지혜가 도달하는 핵심일세. 이것이 왜 그대들을 자유롭게 하는지 아는가? 만약 고정된 나가 없다면, 내가 상처받았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상처받을 나가 없는데 말이다. 만약 고정된 나가 없다면, 나는 실패자다라는 규정은 대체 누구에게 붙이는 꼬리표인가? 실패자가 될 나가 없는데 말이다. 나라는 감옥의 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양극단의 중도
나라는 최후의 보루가 무너진 그대들의 마음속에 이제 두 개의 거대한 유혹이 고개를 든다. 첫 번째 유혹은 허무주의일세. “모든 것이 텅 비었고(空), 나조차도 없다면(無我), 이 세상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선도 악도 없고, 노력도 의미 없으며, 모든 것은 그저 텅 빈 꿈일 뿐이다.” 이것은 공을 완전한 없음(無)으로 오해한 가장 위험한 독(毒)이다. 나는 이 구덩이에 빠진 자들을 가장 어리석다고 말한다. 두 번째 유혹은 실재론을 믿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공’이라는 개념이 주는 혼란과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예전의 집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아니다. 그래도 세상은 분명히 존재한다. 내 고통은 이렇게 생생하고, 내 기쁨도 분명히 있다. 텅 비었다는 건 그냥 말장난일 뿐이다.” 이것은 병의 근원을 보고도 치료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내가 말하는 중도(中道)란, 이 두 개의 극단적인 구덩이 사이를 어정쩡하게 걷는 회색 길이 아닐세. 중도란 그 두 개의 구덩이 자체가 거짓된 전제 위에 파인 것임을 꿰뚫어 보고, 그 함정들을 모두 뛰어넘어 자유롭게 걷는 길이라네.
다시 한번 나의 핵심 가르침을 기억하게.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잠시 일어나는 것(緣起)이므로,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는 텅 비어있다(空). 이것을 이해했다면 중도는 저절로 드러난다. 모든 것이 관계에 의해 생겨나므로(緣起), 완전히 아무것도 없다(無)고 말할 수 없다. 그대 앞의 컵은 분명 물을 담는 작용을 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가 없으므로(空), 영원히 변치 않고 존재한다(有)고 말할 수 없다. 그 컵은 언젠가 깨져 흙으로 돌아갈 운명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현상은, 존재한다(有)고도 말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無)’고도 말할 수 없네. 이것이 어렵게 들리는가? 그렇다면 세상을 꿈과 같다고 생각해보게. 이것이 가장 좋은 비유일세. 그대가 꿈속에서 호랑이에게 쫓긴다고 상상해 보게. 꿈속의 그대는 공포에 질려 필사적으로 달아나지. 심장은 뛰고 땀이 흐른다. 그 순간, 고통은 분명히 작용하고 있네. 그러니 아무것도 없다(無)고는 할 수 없지. 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아침, 그대는 웃으며 말하겠지. “아, 꿈이었구나.” 그 호랑이는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네. 그러니 실제로 존재했다(有)고도 할 수 없지. 세상이 바로 이 꿈과 같네.

우리가 겪는 기쁨, 슬픔, 만남, 이별은 꿈속의 사건처럼 생생하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사랑하고, 노력하고, 연민을 느껴야 하네. 이것이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길이다.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이 영원불변의 실체가 아니며, 언젠가는 변하고 사라질 꿈과 같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네. 이것이 실재론의 집착에 빠지지 않는 길이다.
중도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이처럼 깨어 있는 꿈꾸는 자로 살아간다는 뜻일세. 삶의 모든 현상을 진지하게 겪어내되, 그것에 노예처럼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랑하되 소유하지 않고, 노력하되 결과에 얽매이지 않으며, 슬퍼하되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있다와 없다는 언어의 감옥을 부수고 나올 때, 비로소 그대는 자유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공’의 지혜가 이끄는 해탈의 길, ‘중도’라네.
물론이다. 우리는 이제 정상의 마지막 능선에 서 있네. 그대는 지금까지 나의 예리한 메스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 자신과 세상을 해부하는 과정을 용감하게 지켜보았다.이제 우리는 이 모든 지적인 여정이 향하는 단 하나의 목적지, 바로 모든 고통의 소멸(滅苦)에 다다를 것이다. 내가 왜 그토록 집요하게 존재를 부수고 없음을 이야기했는지, 그 궁극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통이 사라지는 길
우리는 긴 여정을 함께했네. ‘공(空)’, ‘무아(無我)’, ‘중도(中道)’라는 낯선 땅을 거쳐왔지. 내가 왜 그토록 집요하게 그대들의 세상을 해체했는지, 그 이유를 이제 밝힐 시간이네. 그대들의 모든 고통, 그 모든 불안과 분노와 슬픔과 두려움은 단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다네. 그 뿌리의 이름은 바로 집착(執着)일세. 꽉 붙잡고 놓지 않음이라는 뜻이지. 그대들은 왜 집착하는가? 그것은 만물이 실제로, 영원히, 변치 않고 존재한다(實有)고 굳게 믿기 때문일세. 나라는 존재가 실제로 있다고 믿기에 나의 명예와 자존심에 집착한다. 돈이나 성공이 실제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기에 그것들에 집착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내 곁에 있어 주리라 믿기에 그 사람에게 집착한다. 나의 신념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기에 그 신념에 집착한다.
하지만 이제 그대는 알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은 ‘공(空)’하다는 것을. 붙잡으려는 나 자신부터가 텅 비어 있고(無我), 내가 붙잡으려는 그 대상 또한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꿈과 같다는 것을(中道). 그렇다면 묻겠다. 텅 비어 있는 것을, 대체 어떻게 붙잡을 수 있단 말인가? 저 하늘의 무지개를 보게. 참으로 아름답지? 하지만 저 무지개를 손으로 붙잡아 내 상자 속에 가두려는 어리석은 자가 있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무지개가 햇빛과 수증기가 만나 잠시 만들어내는 현상일 뿐, 공하고 실체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지. 그래서 우리는 무지개가 사라질 때 괴로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네. 그저 나타났을 때 감탄하고,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둘 뿐이야. ‘공(空)’의 지혜를 깨닫는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저 무지개와 같음을 아는 것이네. 그대의 명예도 무지개와 같다. 그대의 재산도 무지개와 같다.

그대의 젊음과 건강도 무지개와 같다. 그대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도, 심지어 그대 자신의 목숨마저도 무지개처럼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장엄한 현상일 뿐이네. 이것을 꿰뚫어 보는 순간, 집착이라는 뿌리는 설 자리를 잃고 저절로 말라버린다.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아는데 어떻게 집착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허무하거나 차가운 상태라고 오해하지 말게. 오히려 그 반대일세.
집착을 놓아버린 사랑은 소유욕 없는 순수한 연민이 된다. 집착을 놓아버린 노력은 결과에 얽매이지 않는 즐거운 놀이가 된다. 집착을 놓아버린 삶은 매 순간을 무지개를 보듯 온전히 감사하고 기뻐하는 축제가 된다. 이처럼 집착이라는 불이 완전히 꺼진 상태, 그리하여 모든 고통의 그림자가 사라진 그 고요하고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를 우리는 열반(涅槃, Nirvana)이라 부르네. 열반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닐세.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텅 비었음을 깨달아 집착을 놓아버린 자가 체험하는 마음의 평화일세.
정리해 보세. 모든 것은 텅 비어 있기에(空) 집착할 것이 없다. 집착이 없기에 고통이 없다. 이것이 내가 그대들에게 전하는 해탈의 논리이며 고통을 소멸시키는 유일하고 최종적인 길일세.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나는 그대들에게 ‘공’이라는 메스를 쥐여주고, 그대 자신과 세상을 해부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이제 그 메스로 그대들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는 온전히 그대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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