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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나가르주나 철학에 담긴 행복(3)

by 행복 리부트 2025. 10. 22.


최상의 행복, 해탈(解脫)

나가르주나 철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행복, 즉 즐거운 감정이나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근본적인 것, 바로 해탈(解脫) 또는 열반(涅槃)이다. 해탈이란, 고통의 근원인 윤회(輪廻)의 사슬을 끊고 완전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 경지다. 이 해탈이야말로 그 어떤 외부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최상의 행복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고통의 윤회 속에 묶어두는 사슬은 무엇인가? 나가르주나는 그것이 바로 집착(執着)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 집착은 자성(自性)에 대한 무지(無知)와 착각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의 건강, 나의 재산, 나의 명예, 나의 의견에 강하게 집착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내 곁에 머물기를 바라는 고정된 실체라고 믿고 집착한다. 우리는 행복이라는 상태가 붙잡을 수 있는 실체라고 믿고 그것을 붙잡으려 애쓴다.

열반의 상태에 이른 수행인

 

하지만 세상의 진실은 '공(空)'이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도, 행복이라는 상태도 모두 연기(緣起)하는 현상일 뿐, 고정된 실체(자성)가 없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건강은 악해지고, 재산은 사라지며, 관계는 변한다.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믿고 그것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이 변화의 흐름 앞에서 반드시 실망하고, 불안해하며,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윤회의 감옥이다.

반야(般若)

반야는 세상의 진짜 모습을 꿰뚫어 보는 궁극의 지혜를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고정된 실체가 없고(공, 空),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연기, 緣起) 진실을 깨닫는 지혜이며, 모든 착각과 환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다. 동굴 속을 밝히는 횃불 또는 감옥 문을 여는 열쇠와 같다. 횃불(반야)이 있어야 길을 찾고, 열쇠(반야)가 있어야 문을 열고 나간다.

 윤회(輪廻) 

윤회는 수레바퀴처럼 고통의 세계에서 죽음과 탄생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으로 지은 업(業) 때문에 멈추지 않는 생사의 사이클에 갇혀있는 상태이다. 놀이공원의 회전목마와 같다. 좋은 업을 지어 신들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낡은 목마에서 황금 목마로 갈아타는 것과 같지만, 결국 회전목마 위를 맴도는 것은 똑같다. 

해탈(解脫) 

해탈은 모든 고통과 속박에서 완전히 풀려나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 같은 번뇌와 나라는 집착이 만들어내는 윤회(輪廻)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행위이다.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과 같다. 반야(열쇠)를 사용해서 윤회라는 감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역동적인 과정이 바로 해탈이다.

열반(涅槃), 불이 꺼진 상태

열반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마음의 불꽃이 완전히 꺼진 상태를 말한다. 모든 고통의 원인이 사라진,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평화와 고요의 경지이다. 없어짐(無)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이 사라진 완전한 평화를 의미한다. 활활 타오르던 촛불을 훅 불어서 끈 상태와 같다. 더 이상 뜨거운 불꽃(고통)도, 흔들리는 연기(번뇌)도 없는 완전한 평온의 상태이다.

세 개념의 관계

반야(횃불/열쇠)라는 지혜를 통해, 고통의 감옥에서 해탈(탈출)하여, 열반(완전한 평화)의 상태에 이른다. 나가르주나가 제시하는 행복, 즉 해탈은 이 감옥의 열쇠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열쇠는 바로 '공'에 대한 통찰, 즉 반야(般若)의 지혜다.

 

집착을 놓아 버린 평화

'공'을 깨닫는다는 것은 내가 그토록 꽉 움켜쥐고 있던 주먹 안에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음을 깨닫는 것과 같다. 내가 나라고 집착하던 것이 비어 있음을 볼 때, 사랑이라고 집착하던 것이 비어 있음을 볼 때, 성공이라고 집착하던 것이 비어 있음을 볼 때, 움켜쥐었던 주먹은 저절로 힘이 빠지며 스르륵 펼쳐진다. 이것이 집착을 놓아버림의 과정이다.


집착에서 벗어나는 행복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나를 지키려는 끝없는 불안에서 벗어난다. 남들의 비난에 쉽게 상처받지 않고, 칭찬에 쉽게 우쭐대지 않는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태도나, 나를 내세우려는 교만이 사라진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나'라는 감옥이 비어 있음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

옳고 그름을 벗어나는 행복

윤회의 고통을 벗어 나는 해탈의 과정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강력하게 집착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논쟁과 갈등, 미움이 발생한다. 하지만 공의 관점에서 보면, 옳음과 그름' 역시 고정된 실체가 없는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나의 옳음은 특정 조건과 관점하에서만 성립하는 연기적 현상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으면, 내 의견에 대한 아집이 누그러지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너그럽게 포용할 수 있게 된다. 독단과 편견에서 벗어난 유연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얻게 된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감정이 생기면, 나의 괴로움이라는 실체로 만들고 그것에 집착한다. "나는 정말 괴로워"라고 되뇌며 괴로움을 더욱 키운다. 하지만 '공'의 지혜로 보면, 괴로움 또한 수많은 원인과 조건이 만나  잠시 일어난 현상일 뿐이다. 그것은 영원히 머무는 실체가 아니라 왔다가 흘러가는 구름과 같다. 괴로움이 텅 비어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괴로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신, 그것을 차분히 바라보고 흘려 보낼 수 있는 힘과 여유를 얻게 된다.

열반은 

나가르주나는 여기서 가장 파격적이고 심오한 선언을 한다. "윤회와 열반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涅槃與世間 無有少分別)." 이것은 무슨 뜻인가? 고통의 세계(윤회)를 떠나 저 멀리 어딘가에 행복의 세계(열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윤회와 열반은 두 개의 다른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똑같은 현실을 바라보는 두 개의 다른 관점이다. 세상을 자성이 있는 실체들의 집합으로 바라보는 무지의 눈, 즉 집착의 눈으로 보면 그곳이 바로 윤회의 감옥이다. 반면, 똑같은 이 세상을 자성이 텅 빈 공의 세계,  즉 연기의 그물망으로 바라보는 지혜의 눈으로 보면 그곳이 바로 열반의 해탈이다.

 

궁극의 행복에 이르는 길

 

행복은 어딘가로 가서 얻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의 관점을 바꾸는 혁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감옥의 창살이 원래부터 없었음을 깨닫는 순간, 감옥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니다. 고통의 바다가 사실은 텅 비어 있음을 깨닫는순간, 그 바다는 곧바로 평화로운 열반의 바다가 된다.

 

3. 궁극의 행복

그렇다면 모든 것이 공함을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모든 것에 무관심한 채 홀로 고요함에 잠겨있을까? 나가르주나와 대승불교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공'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은 필연적으로 자비(慈悲)를 낳는다. 왜냐하면 나와 너를  가르는 경계선이 사실은 환영이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나와 너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연기의 그물망 속에서 연결된 존재다.

 

이러한 통찰은 다른 존재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느끼게 한다. 아직 자성이라는 꿈속에서 헤매며, 텅 빈 그림자를 붙잡으려 애쓰다가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을 향한 끝없는 연민이 솟아난다. 그래서 진정으로 '공'을 깨달은 보살은 개인의 해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기꺼이 윤회의 세상 속으로 다시 뛰어든다. 모든 것이 꿈이고 환영임을 알기에, 그는 더 이상 세상의 고통에 물들거나 상처받지 않는다. 그는 꿈속에서 고통받는 다른 이들을 깨우기 위해, 마치 자비로운 의사처럼, 혹은 능숙한 마술사처럼 자유롭게 활동한다.
이것이 나가르주나 철학이 보여주는 최상의 행복이다. 그것은 '공'의 지혜를 바탕으로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한 자비를 실천하는 삶이다. 텅 비어 있기에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하늘처럼, 나와 너의 구별이 사라진 자리에서 무한한 사랑과 연민을 실천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나가르주나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자유로운 행복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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