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존재하는가?
나가르주나 철학의 모든 것은 단 하나의 개념을 파괴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자성(自性)이라는 개념이다.

자성이란, 어떤 사물이나 개념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힘으로, 독립적으로, 영원불변하게 존재하는 고유한 성질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원래부터 그것인 어떤 것 이다. 예를 들어 나라는 존재가 부모나 음식, 공기, 사회와 상관없이 원래부터 나로서 존재한다는 생각, 책상이라는 것이 나무나 목수의 노동과 상관없이 원래부터 책상 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바로 자성에 대한 믿음이다. 나가르주나는 이 자성이라는 관념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고통과 번뇌의 뿌리라고 진단했다. 우리는 나, 너, 사랑, 돈, 국가 같은 것들이 고정된 실체(자성)를 가지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 실체에 좋다, 나쁘다는 가치를 부여하고, 좋은 것은 영원히 붙잡으려 하고(집착), 나쁜 것은 영원히 밀어내려 한다(혐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므로, 이 집착과 혐오는 반드시 좌절과 고통을 낳는다. 따라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자성이라는 환상을 깨뜨리는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이 환상을 깨기 위해 연기(緣起)라는 망치를 사용한다.
만능열쇠, 연기(緣起)
'연기'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붓다의 근본 가르침이다.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무한한 원인과 조건들이 서로 관계를 맺어(緣) 일어난다(起)는 뜻이다.나가르주나는 이 '연기'의 개념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만약 모든 것이 연기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하는 '자성'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것에 '의존'해서 존재하는 것은 결코 '독립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부모님(원인)이 계셨기에 태어났고, 음식과 공기(조건)가 있기에 숨 쉬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라는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 모든 원인과 조건들을 빼고 나면, 나라고 부를 만한 고정된 실체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책상은 무엇인가? 책상은 나무, 못, 접착제, 목수의 노동, 책상이라는 디자인 개념 등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잠시 모여 있는 것일 뿐이다. 나무로 돌아가고 썩어서 흙으로 돌아갈 수 있다. 책상이라는 독립적이고 영원한 실체(자성)는 없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다. 이것이 연기의 법칙이다. 그리고 이 연기의 법칙을 철저하게 적용했을 때 드러나는 세상의 참모습, 그것이 바로 '공(空)'이다.
세상의 진실, 공(空)
나가르주나 철학의 심장인 '공(空)'은 가장 오해받기 쉬운 개념이다. 공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허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나가르주나의 철학은 허무주의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가르주나가 말하는 '공'은 자성이 공하다는 뜻이다. 즉, 모든 존재는 독립적인 실체가 텅 비어 있다는 의미다. 이는 존재의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을 설명하는 것이다. 세상은 텅 빈 진공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관계의 그물망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연기이기에 공이라고 말한다(因緣所生法 我說即是空)." 연기와 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모든 것이 서로에게 의존하기 때문에(緣起), 모든 것은 독립적인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텅 비어 있다(空). 오히려 이 '공'이야말로 모든 변화와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다. 만약 씨앗이 씨앗이라는 고정된 자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영원히 씨앗으로만 있어야 하고 결코 싹이 틀 수 없을 것이다. 씨앗이 씨앗이라는 자성으로부터 '공'하기 때문에, 물과 흙과 햇빛이라는 연(緣)을 만나 싹이라는 새로운 현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어제의 나라는 고정된 자성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결코 배우고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나 라는 자성으로부터 '공'하기에,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펼칠 수 있다. 따라서 '공'은 허무나 절망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의 공간이다. 모든 것이 텅 비어 있기에 모든 것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두 개의 진실, 이체(二諦)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세상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다면, 지금 내 눈앞의 이 컵은 무엇이며, 고통을 느끼는 나는 누구인가?
나가르주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 진실(二諦)의 개념을 제시한다. 첫째는 세속제(世俗諦)이다. 속세의 진실 또는 관습적 진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다. 여기서는 나도 있고, 너도 있으며, 컵도 있고, 행복과 고통도 있다. 이것은 언어와 약속으로 이루어진 관습적인 실재다. 나가르주나는 이 세속제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세속제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궁극의 진리인 승의제를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할 정도다. 마치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면, 우선 배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이용해야 하는 것과 같다.
둘째, 승의제(勝義諦)이다. 궁극의 진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속제의 모든 현상이 실제로는 연기하는 것이며, 고정된 자성이 없는 '공'의 상태임을 통찰하는 지혜의 세계다. 컵은 있지만, 컵이라는 독립적인 실체는 없다. 고통은 있지만, 고통이라는 영원한 실체는 없다. 나가르주나의 지혜는 이 두 개의 진실을 동시에 살아가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스크린 속 주인공의 슬픔에 함께 울고 기쁨에 함께 웃는다(세속제).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것이 스크린 위에 비친 빛과 그림자의 환영일 뿐, 실제가 아님을 알고 있다(승의제). 이 두 가지를 모두 알기에 우리는 영화에 깊이 몰입하면서도, 영화가 끝났을 때 그 슬픔에 영원히 빠져 있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을 '공'하다고 보는 것은 세상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이라는 영화를 더욱 깊이 체험하되 그 내용물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영원과 허무 사이, 중도(中道)
나가르주나는 자신의 철학이 중도(中道)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의 철학은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모두 피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극단은 상견(常見) 또는 유(有)의 견해이다. 세상의 모든 것, 혹은 어떤 근원적인 실체(신, 자아, 법 등)가 영원히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나가르주나는 연기와 공의 논리로 이 견해를 철저히 파괴한다. 두 번째 극단은 단견(斷見) 또는 무(無)의 견해이다.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인과응보나 윤리도 없다는 허무주의다. 나가르주나는 이 견해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존재가 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 존재는 세속제로서 분명히 기능하며, 인과법칙(연기)에 따라 엄연히 작동한다고 말한다. 나가르주나의 중도는 있음(有)과 없음(無)이라는 양극단을 모두 부정하는 외줄타기다. 존재는 있지도 않고, 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존재는 그저 꿈이나 환영처럼, 연기의 법칙에 따라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이 아슬아슬한 진실을 직시할 때, 우리는 있다는 집착과 없다는 허무 모두에서 벗어나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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