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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노자, 장자 철학에 담긴 행복(3)

by 행복 리부트 2025. 10. 22.

세상의 기준을 뒤엎는 즐거움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행복은 공자와 맹자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유가의 행복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도덕적 성취를 이루는 데 있다면, 도가의 행복은 그러한 모든 사회적 역할과 도덕적 기준으로 부터 벗어나는 자유 그 자체에 있다. 그들이 말하는 행복은 이미 가지고 있는 불필요한 것들을 '내려놓음'으로써 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을 통쾌하게 뒤집어엎는 데서 오는 역설의 즐거움이다.

 

무용지용(無用之用)의 행복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한다.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업을 갖고, 돈을 많이 버는 것, 이 모든 것이 쓸모 있음의 증거로 여겨진다. 하지만 장자는 이 쓸모 있음이야말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족쇄라고 말한다. 장자는 여러 가지 쓸모없는 것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중 하나는 가죽나무(樗) 이야기다. 장자의 친구 혜시(惠施)가 불평을 털어놓는다. "내게 큰 가죽나무가 있는데 줄기는 울퉁불퉁하고 가지는 비비 꼬여서 목수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네.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야."

무용지용, 못 우는 거위가 오래 산다

 

그러자 장자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자네는 왜 그 나무를 아무도 없는 넓은 들판에 심어놓고, 그 아래서 한가롭게 거닐거나 편안하게 낮잠을 잘 생각은 못 하는가? 그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도끼에 잘릴 걱정이 없고, 아무도 그 나무를 해치지 않을 것이네. 쓸모없음이 오히려 그 나무에게는 가장 큰 쓸모(用)가 된 것이지. 이것이 바로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일세." 곧게 잘 자란 나무는 베어져서 기둥이나 가구가 되지만, 구불구불 못생긴 나무는 베이지 않고 살아남아 거대한 그늘을 드리운다. 잘 우는 거위는 잡아먹히지만 못 우는 거위는 살아남는다. 이처럼 세상이 정한 '유용성'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에 쓸모없다, 실패했다고 평가받는 삶 속에 오히려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평화와 자유가 깃들 수 있다는 것이 장자의 통찰이다. 도가의 행복은 이처럼 세상의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 자체를 무너뜨리는 데서 시작된다.

 

좌망(坐忘)의 행복

우리의 고통은 대부분 나라는 생각, 즉 자의식(ego)에서 비롯된다. 나는 남보다 뛰어나야 하고, 나는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며, 나는 상처받기 싫어한다. 장자는 이 고통의 근원인 나를 잊어버리는 경지를 최고의 행복으로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좌망(坐忘)이다. 좌망은 앉아서 잊는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 안회와 공자의 대화 형식을 빌려 장자는 이 경지를 설명한다. "팔다리와 몸뚱이를 떨어뜨리고, 보고 듣는 작용을 멈춘다. 형체를 떠나고 지식을 버려서, 위대한 도와 하나로 통하는 것, 이것이 좌망이다." 무엇을 잊는가? 첫째, 나의 육체를 잊는다. 둘째, 세상이 주입한 지식과 상식, 도덕적 구별(옳고 그름,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을 잊는다. 이렇게 나를 꽁꽁 묶고 있던 모든 관념의 껍데기를 벗어던질 때, 비로소 참된 나는 우주의 거대한 흐름인 도와 하나가 된다. 더 이상 나라는 개별적인 존재는 없고 도와 함께 흐르는 순수한 존재만이 남는다. 이것은 모든 불안과 공포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다. 나라는 작은 감옥에서 벗어나 우주라는 광대한 공간과 하나가 되는 체험이다. 좌망의 행복은 내가 사라짐으로써 가장 큰 자유와 평화를 얻는 기쁨이다.

 

호접지몽(胡蝶之夢)의 행복

장자의 철학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나비의 꿈 이야기일 것이다. "언젠가 나 장주(莊周)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스스로 매우 즐겁고 유쾌했다. 내가 장주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나는 틀림없는 장주가 아닌가. 도대체 장주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나비인 내가 지금 장주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호접지몽 중인 장자

 

이것은 나라는 존재의 확실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우리는 '현실의 나가 진짜라고 굳게 믿고 살아가지만, 그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현실과 꿈의 경계가 이토록 모호하다면,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나의 성공, 나의 슬픔,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과연 절대적인 것일까? 호접지몽이 주는 행복은 내려놓음의 행복이다. 나의 존재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나비도 될 수 있고 장주도 될  수 있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나의 과정(物化)임을 깨닫는 데서 오는 자유로움이다. 삶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한바탕의 즐거운 꿈처럼 유희하듯 살아갈 수 있는 여유, 이것이 나비의 꿈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안시이처순(安時而處順)의 행복

인간의 가장 큰 공포는 죽음이다. 하지만 장자는 죽음조차도 자연스러운 변화의 한 과정으로 보고, 그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 친구 혜시가 조문하러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장자는 무덤 앞에서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시가 기가 막혀서 "함께 살던 사람이 죽었는데, 곡을 하지는 못할망정 노래를 부르다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라고 꾸짖었다.

안시이처순의 행복

 

그러자 장자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라고 처음부터 슬프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내는 원래 형체도, 기운도, 생명도 없는 존재였네.  어쩌다 기운이 모여 생명이 되고 형체를 갖춰 태어났다가, 이제 다시  흩어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일세. 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하는 것과 같은 자연의 이치지. 지금 아내는 천지라는 거대한 방 안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네. 그런데 내가 그 옆에서 엉엉 울고불고한다면 그건 천명을 모르는 짓이 아닌가. 그래서 곡을 그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네."

장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변화일 뿐이다. 삶에 집착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계절의 변화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때를 편안히 여기고(安時) 순리에 머무를(處順) 때, 슬픔과 기쁨의 감정이 더 이상 끼어들 수 없는 평화의 경지에 이른다. 죽음이라는 가장 큰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얻는 이 궁극의 평온이야말로 도가적 행복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소요유(逍遙遊)의 행복

소요유는 장자 철학의 이상향이자, 책의 첫 장 제목이다. 소요(逍遙)는 목적지 없이 이리저리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이고, 유(遊) 는 논다는 뜻이다. 즉, 소요유는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정신의 경지에서 노니는 삶을 의미한다. 장자는  이 경지를 붕(鵬)이라는 상상 속의 거대한 새에 비유한다. 북쪽 바다에 사는 곤(鯤)이라는 거대한 물고기가 새로 변한 것이 붕인데, 그 크기가 수천 리에 달한다. 이 새가 한번 날개짓을 하면 구만리 상공으로 솟아올라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땅 위에서 참새나 비둘기 같은 작은 새들은 "우리가 힘껏 날아봐야 저 나무에 부딪히는데, 저놈은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걸까?"라며 붕을 비웃는다.

소요유의 행복을 누리는 붕

 

작은 새들은 붕의 거대한 스케일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작은 기준(성공, 명예, 돈)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은 소요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절대적인 자유를 이해할 수 없다. 소요유의 행복은 나의 시야를 구만리 상공의 붕처럼 넓혀, 지상의 사소한 이해득실과 시시비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결국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행복은 비움과 버림과 자유라는 세 단어로 요약된다.  인위적인 욕심과 지식, 사회적 평가와 나라는 집착을 모두 비워낼 때, 우리는 비로소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소요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것은 시끄러운 세상과는 멀리하고, 내 안의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자연의 소리를 듣는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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