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할 수 없는 것, 도(道)
노자와 장자 철학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은 바로 도(道)다. 하지만 이 도는 유가에서 말하는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과는 완전히 다르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인간의 언어나 생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우주 만물이 생성되고 움직이는 근원적인 원리이자 흐름 그 자체다. 도덕경의 첫 구절은 이 도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이 문장은 도가 철학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폭탄선언과도 같다. 우리가 도라고 부르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진짜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손으로 물을 잡으려는 시도와 같다. 물을 잡으려 힘을 줄수록 물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진짜 도는 이름 붙여지고 개념화되는 것을 거부한다.
노자는 이 신비로운 도를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통나무(樸)와 같고, 모든 것을 낳지만 스스로 내세우지 않는 만물의 어머니(天下母)와 같으며, 텅 비어있지만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그릇(器)이나 계곡(谷)과도 같다. 도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자 생명력 그 자체다.

노자의 도가 이처럼 우주적이고 신비로운 원리에 가깝다면, 장자는 그 도를 우리의 발밑으로 끌어내린다. 제자가 장자에게 "도대체 도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장자는 무심하게 대답한다. "개미에게 있다." 제자는 실망하며 더 고상한 것을 기대한다. "그럼 더 아래에는요?" "강아지풀에 있다." "더 아래에는요?" "깨진 기왓장에 있다." 제자가 경악하자 장자는 마지막 쐐기를 박는다. "똥과 오줌에도 있다(在屎溺)." 이 충격적인 대화는 도에 대한 모든 위계질서를 파괴해 버린다. 도는 가장 비천하고 더러운 곳을 포함한 세상 만물 어디에나 존재한다. 아름다운 꽃에도, 썩어가는 시체에도 도는 똑같이 흐르고 있다. 장자에게 도는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의 생생한 현실이었다.
텅 비어있는 힘, 덕(德)
'덕(德)' 역시 유교의 덕과는 의미가 다르다. 유교의 덕이 인의예지 같은 도덕적 품성을 의미한다면, 도가의 덕은 만물이 도(道)로부터 부여받은 고유한 본성 또는 내재적인 힘을 의미한다. 나무의 덕은 나무답게 자라는 것이고, 물고기의 덕은 물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것이다. 노자는 최고의 덕을 갓난아기의 상태에 비유한다. 갓난아기는 유연하고 생명력이 넘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이롭고 해로운지를 따지지 않는다. 그저 순수하게 자신의 본성(德)을 따라 살아갈 뿐이다. 인간이 성장하며 지식과 욕심, 사회적 규범에 물들수록 이 순수한 덕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노자는 "덕을 두텁게 품은 이는 갓난아기와 같다"고 말하며, 인위적인 가치를 비우고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다.
장자는 이 덕의 개념을 더욱 기발한 방식으로 풀어낸다.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쓸모없거나 불완전한 존재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팔다리가 없거나 등이 굽은 사람들,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세상은 이들을 불행하고 불완전하다고 손가락질하지만, 장자는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자신의 덕을 온전히 보존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존재라고 말한다.예를 들어, 다리가 하나뿐인 외발이 기(夔)는 발이 많은 지네를 부러워하지 않고, 지네는 발 없이 다니는 뱀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각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본성(德) 안에서 만족하며 살아간다.

또한 목수가 보기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구불구불한 나무는, 그 쓸모없음 때문에 베이지 않고 거목으로 자라나 수많은 사람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준다. 세상이 정한 '유용성'의 기준에 맞추려 자신의 본성(德)을 왜곡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지키고 더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도가의 덕은 '비움'과 '자연스러움'을 통해 역설적으로 완성된다.
하지 않음으로 이룬다, 무위(無爲)
'무위(無爲)'는 도가 철학의 핵심적인 실천 방법론이다. 글자 그대로 풀면 함이 없음이지만, 이는 게으름을 피우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위는 억지로,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물이 흐르듯 자연의 흐름(道)에 순응하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발성이며, 힘을 빼고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기술이다.
노자는 '무위'를 주로 통치 철학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최고의 통치자는 '무위로 다스린다(無爲而治)'. 그는 법을 많이 만들거나, 세금을 많이 걷거나, 백성들의 삶에 사사건건 간섭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있음으로써 백성들이 각자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둔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굽는 것과 같다(治大國 若烹小鮮). " 생선을 자꾸 뒤집으면 살이 부서지듯, 통치자가 자꾸 간섭하면 나라가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성인이 무위의 정치를 하면, 백성들은 "우리가 스스로 이렇게 되었다(我自然)"고 말하며 평화롭게 살아간다고 노자는 말한다.
장자는 무위의 개념을 개인의 삶과 기술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그 대표적인 예가 포정해우(庖丁解牛), 즉 백정 정(丁)이 소를 잡는 이야기다. 문혜군이라는 왕이 백정 정의 소 잡는 솜씨를 보고 감탄한다. 그의 칼 놀림은 마치 아름다운 춤과 같았다. 왕이 그 비결을 묻자, 정이 대답한다. "제가 관심 있는 것은 도(道)이지, 기술이 아닙니다.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정신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칼을 소의 뼈와 살이 아닌, 그 사이의 빈 공간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그래서 19년 동안 칼을 썼지만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처럼 날카롭습니다."

백정 정의 행위가 바로 '무위'의 완벽한 예시다. 그는 억지로 소의 뼈나 살을 자르려 하지 않는다. 소의 자연스러운 결을 따라 힘들이지 않고 칼을 움직인다. 그는 소와 하나가 되어, 의식적인 노력과 저항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무위의 삶이다. 삶이라는 거대한 소를 마주했을 때, 억지로 싸우고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연스러운 결을 따라 춤추듯 살아가는 것이다.
저절로의 길, 자연(自然)
자연(自然)은 도가 철학의 궁극적인 이상향이다. 자연은 산과 들을 의미하는 'nature'라기보다, 스스로(自) 그러하다(然)'는 의미의 spontaneity에 가깝다. 즉, 외부의 어떤 간섭이나 목적 없이, 그저 저절로 그렇게 되어가는 상태를 말한다. 우주는 어떤 신이 의도를 가지고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변화해간다.
도가의 목표는 인간의 삶을 이러한 자연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인위적인 모든 것을 덜어내고, 문명과 사회가 우리에게 씌운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래의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교의 인의예지(仁義禮智)는 가장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노자는 "큰 도(大道)가 사라지니 인의(仁義)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원래 자연스럽게 서로 사랑하고(仁) 올바르게(義) 행동했을 때는 굳이 인이나 의라는 이름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본성을 잃고 타락하자, 인을 실천하라, 의를 지켜라와 같은 인위적인 도덕률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건강한 사람에게 약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장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인이 죽지 않으면 큰 도둑이 그치지 않는다(聖人不死 大盜不止)"는 더욱 과격한 주장을 펼친다. 유교의 성인들이 만들어 놓은 도덕과 제도가 오히려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억압하고 위선자를 만들어내며, 성인의 물건을 훔치려는 더 큰 도둑을 만들어낸다는 역설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모든 인위적인 도덕과 제도를 폐기하고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도가 사상이 품고 있는 무정부주의적이고 문명 비판적인 주장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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