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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노자, 장자의 시대적 배경과 삶(1)

by 행복 리부트 2025. 10. 22.


조용히 귀를 막다

노자와 장자가 활동했던 시대는 공자, 맹자와 마찬가지로 춘추전국시대였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랐다. 공자와 맹자가 이 혼란을 고장 난 세상으로 보고 어떻게든 고쳐보려는 의사(醫師)의 마음을 가졌다면, 노자와 장자는 이 혼란이 너무 똑똑하고 잘난 체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진단했다. 세상은 온통 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군주들은 더 많은 영토를 가져야 한다고 외쳤고, 신하들은 더 높은 벼슬에 올라야 한다고 발버둥 쳤다. 유학자들은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도덕률을 만들어 백성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법가 사상가들은 엄격한 법으로 세상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두가 자신만의 거창한 계획과 이상을 가지고 세상을 재단하려 들었다.

 

노자와 장자의 눈에 이 모든 것은 그저 소음일 뿐이었다. 그들은 한 걸음 물러서서 이 아수라장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결론을 내렸다.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는 모두가 무언가를 억지로 하려고(有爲) 하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모든 노력이 오히려 세상을 망치고 있다. 최고의 해결책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無爲)이다." 이 파격적인 생각은 당시 모든 사상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장이었다. 그들은 시끄러운 세상의 스피커를 꺼버리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 최초의 아나키스트(anarchist) 철학자들이었다.

 

노자, 안개 속에 숨다

노자(老子)는 그 존재 자체가 도(道)의 신비로움을 닮아있다. 그가 실제로 누구인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역사 속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보다, 안개처럼 희미한 전설로 남기를 선택한 듯하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이이(李耳)이고, 춘추시대 주나라 왕실의 도서관을 관리하던 사관(史官)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직업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왕실 도서관에는 수백 년간 쌓여온 역사 기록, 즉 인간의 성공과 실패, 지혜와 어리석음이 가득했다. 노자는 매일같이 그 기록을 보며 인간 세상의 흥망성쇠가 얼마나 덧없는지를 통찰했을 것이다. 왕조가 바뀌고 영웅이 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계절의 순환처럼 거대한 자연의 흐름뿐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검은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나가는 노자

 

어느 날, 젊고 열정적인 사상가 공자가 그를 찾아왔다. 공자는 예(禮)에 대해 묻기 위해서였다. 공자는 예를 통해 무너진 사회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노자의 대답은 냉정했다. "당신이 말하는 예란, 그것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뼈와 함께 이미 썩어버렸소. 군자는 때를 만나면 수레를 타고 다니지만, 때를 못 만나면 그저 다 쓰러져가는 쑥대밭처럼 떠돌 뿐이오. 그대의 교만과 욕심, 잘난 체하는 태도와 끝없는 야망을 버리시오. 그것들은 당신에게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소." 이 대화는 유가와 도가의 근본적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위적인 규범(禮)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는 공자와, 그러한 인위적인 노력 자체를 교만과 욕심으로 규정하고 버리라고 말하는 노자. 두 거인의 만남은 서로 다른 길을 예고하는 철학사의 명장면 중 하나다.

 

결국 노자는 주나라가 쇠락하는 것을 보고 세상을 등지기로 결심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검은 소를 타고 서쪽의 국경인 함곡관을 넘으려 했다. 그때 관문을 지키던 관리 윤희(尹喜)가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냥 떠나지 말고 세상을 위해 지혜를 글로 남겨달라고 간청했다. 노자는 마지못해 멈춰 서서 5천여 자의 글을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도덕경(道德經)이다. 그는 글을 남긴 뒤 홀연히 사라졌고, 그 뒤로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도덕경은 세상에 던지는 그의 마지막 작별 인사였던 셈이다.

 

장자는 자유인

노자가 신비로운 전설의 인물이라면, 장자(莊子)는 그보다 좀 더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맹자와 비슷한 시기인 전국시대에 송나라의 몽(蒙)이라는 지역에서 살았다. 그의 이름은 주(周)라고 전해진다. 그는 옻나무 동산을 관리하는 하급 관리로 일했다고 한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풍요로웠다.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초나라 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사신을 보냈다. 사신들은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와서 그에게 재상 자리를 제안했다. 온 나라를 다스리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하지만 장자는 낚싯대를 드리운 채 돌아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초나라에는 신성한 거북이가 있다고 들었소. 죽은 지 삼천 년이 되었는데, 왕은 그 껍데기를 비단에 싸서 금 상자에 넣어 소중히 모신다고 하더군. 자, 그 거북이는 죽어서 뼈만 남아 귀하게 대접받는 게 좋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는 게 좋겠소?" 사신들은 당연히 "살아서 진흙탕에서 꼬리를 끄는 게 낫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장자가 웃으며 말했다. "돌아가시오. 나도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며 놀겠소." 권력이라는 화려한 상자 속에 갇힌 박제된 삶보다 가난하더라도 자유롭게 살아있는 삶을 선택하겠다는 그의 선언이었다.

초나라 사신과 대화를 나누는 장자

 

장자는 공자나 맹자처럼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기상천외한 이야기와 비유, 날카로운 유머가 담긴 장자라는 책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펼쳐 보였다. 그의 책 속에는 하늘을 나는 거대한 새 붕(鵬), 쓸모없어서 오히려 천수를 누리는 거대한 나무, 신의 경지에 이른 기술을 보여주는 목수와 백정,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불구이지만 누구보다 자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묘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그의 삶은 그의 책 속에, 그의 이야기 속에 녹아 있다. 그는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려 한 위대한 이야기꾼이었다.

 

동시대, 다른 메아리

노자와 장자가 동아시아에서 문명의 인위성을 비판하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외칠 때, 다른 문명권에서도 비슷한 목소리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자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流轉)한다(Panta rhei)"고 말하며, 세상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고 보았다. 이는 고정된 실체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道)'의 개념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또한 장자와 비슷한 시기, 아테네의 거리에는 디오게네스 같은 견유학파(Cynics) 철학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사회적 관습, 부, 명예를 모두 경멸하고, 통나무 술통 속에서 개처럼 살며 자연스러운 삶을 추구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내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주시오"라고 대답한 디오게네스의 일화는 초나라 재상 자리를 거절한 장자의 모습과 정확히 겹쳐진다.

 

인도는 불교가 막 탄생하고 발전하던 시기였다. 붓다는 인간 고통의 원인이 집착과 갈망에 있다고 보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이 텅 비어있다(空, Śūnyatā)는 가르침은, 도가에서 말하는 비움(虛)의 철학과 깊이 연결된다. 자아(ego)라는 것이 실체가 없는 허상임을 깨닫고 집착을 버림으로써 해탈에 이른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인위적인 이름과 구별을 모두 잊어버리고 도(道)와 하나가 되려는 도가의 목표와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훗날 중국에서 불교와 도가가 만나 선(禪)불교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처럼 기원전 5~4세기경, 동서양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문명의 화려함과 인위적인 제도에 대한 깊은  회의를 품고 본래적인 것, 자연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있었다. 노자와 장자는 그 흐름의 동아시아적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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