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노자, 장자가 전하는 행복 메시지(4)

by 행복 리부트 2025. 10. 22.


안녕하신가 친구들

오랜만이군. 아니, 처음 뵙는다고 해야 하나. 우리는 그대들이 역사라고 부르는 먼지 쌓인 책장 속에 사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지. 

나는 소를 타고 서쪽으로 사라진 늙은이(老子)이기도 하고, 옻나무 동산에서 나비의 꿈을 꾸던 장난꾸러기(莊子)이기도 하다. 
우리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네. 우리는 그저 물의 속삭임이고, 바람의 침묵이며, 그대들의 끝없는 생각과 생각 사이에 잠시 머무는 고요함이다. 우리가 살던 시대와 그대들이 사는 시대는 참 많이 다르더군. 우리는 진흙 길을 걸었고, 그대들은 하늘을 나는 쇠로 만든  새를 타고 다닌다. 우리는 호롱불 밑에서 글을 읽었고, 그대들은 손바닥만 한 빛나는 상자(그대들은 스마트폰이라 부르더군)로 세상의 모든 것을 들여다본다. 참으로 대단한 세상이다. 인간의 지혜가 이토록 많은 것을 이룩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대들은 달에도 가고, 바다 깊은 곳도 탐사하며, 과거에는 신의 영역이라 불렸던 많은 비밀을 풀어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그대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몹시 지쳐 보인다. 그대들은 그토록 많은 것을 가졌는데,  왜 그리 불안해하는가? 그대들은 그토록 빨리 달릴 수 있는데 왜 그리 초조해하는가? 그대들은 그토록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데, 왜 그토록 외로워 보이는가? 우리는 그대들을 비판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영웅과 현자들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비법을 외쳤건만, 인간의 고통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흥미로워서 말이다. 어쩌면 그대들은 너무 많은 것을 하려다가 길을 잃은 것은 아닐까? 너무 많은 것을 알려다가 가장 중요한 것을 잊은 것은 아닐까? 

잠시 그 빛나는 상자를 내려놓고, 우리의 오래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지 않겠는가? 정답은 없다. 우리는 그저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그대들이 그토록 힘겹게 올라가고 있는 사다리 옆에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

 

더 많이라는 병

그대들의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유령이 있다면, 그것은 더(more)라는 유령이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넓은 집, 더 빠른 차, 더 많은 친구, 더 많은 정보, 그대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우고 더하는 삶을 산다.

현대인, 소유하는 행복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사람들 같다. 우리는 오래전에 말했다. "오색(五色)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五音)이 사람의 귀를 먹게 하며,  오미(五味)가 사람의 입맛을 버리게 한다." 이 말은 그대들의 시대에 더욱 절실하게 들린다. 그대들의 눈은 현란한 광고와 영상에 눈이 멀어, 저녁노을의 미묘한 색 변화를 보지 못한다. 그대들의 귀는 자극적인 음악과 소음에 길들여져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나 자신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대들은 행복이 소유에 있다고 믿는 듯하다. 하지만 가만히 보라. 그대들이 무언가를  소유했을 때의 기쁨은 얼마나 오래가던가? 새로운 차를 샀을 때의 흥분은 몇 달 뒤 익숙함으로 변하고, 새로운 옷을 샀을  때의 만족감은 다음 유행 앞에서 시들해진다. 소유를 통한 행복은 이처럼 짧고 덧없다. 그것은 갈증을 소금물로 달래는 것과 같다. 마실수록 더 큰 갈증을 불러올 뿐이다. 진정한 풍요는 가진 것의 양에 있지 않다. 원하는 것의 크기에 있다. 강물은 세상을 다 가지려 하지 않기에 늘 가득 차 흐를 수 있다. 계곡은 텅 비어 있기에 모든 소리를 품을 수 있다.

 

그대들의 삶에서 빼기를 해보는 것은 어떤가? 창고에 쌓아둔 쓰지 않는 물건들을 덜어내 보라. 그대들의 시간을 좀먹는 무의미한 약속을 덜어내 보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불필요한 욕망을 덜어내 보라. 덜어내고 비워낼수록, 그대들의 삶에는 오히려 더 많은 공간과 자유가 생겨날 것이다. 행복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잔에 담기는 술과 같다.

 

좋아요라는 감옥

우리가 보기에 그대들 시대의 가장 기이한 풍경 중 하나는, 수많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관객들을 향해 끊임없이 삶을 전시하고 평가받는다는 것이다. 그대들은 그것을 소셜 미디어라고 부르더군. 그대들은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기 전에, 먼저 그것을 기록하려 한다. 그리고 그 기록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좋아요라는 이름의 인정을 구걸한다. 그 순간, 그대들은 현실에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박제하여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삶을 살게 된다. 그대들이 그 안에 만들어 놓은 나는 진짜 나인가? 가장 행복해 보이는 순간, 가장 지혜로워 보이는 글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각도로 연출된 그 모습이 과연 그대들 자신인가? 그것은 잘 다듬어진 가면일 뿐이다. 그 가면 뒤에서 그대들은 자신의 초라함, 불안함, 외로움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타인의 박수갈채가 클수록, 가면 뒤의 고독은 더욱 깊어진다.

 

나는 일찍이 초나라 왕이 재상 자리를 제안했을 때 거절한 적이 있다. 죽어서 껍데기만 남아 황금 상자 속에서 귀하게 대접받는 신성한 거북이가 되기보다, 살아서 진흙탕에서 꼬리를 끌며 자유롭게 노니는 평범한 거북이가 되겠다고 말했다. 그대들의 소셜 미디어 속 완벽한 자아는 바로 그 황금 상자 속 거북이 껍데기와 같다. 화려하지만 생명이 없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오라. 좋아요의 개수로 자신의 가치를 매기지 말라. 그대들은 타인의 평가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대들은 그 자체로 완전한 우주다.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들풀의 당당함을 배우라.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향기를 뿜어내는 난초의 기품을 배우라. 진정한 만족은 외부의 인정이 아닌, 내면의 고요한 확신에서 온다.

 

어려운 기술, 안 하기

그대들은 바쁨을 미덕으로 여기는 듯하다. 잠시의 틈도 없이 일정을 쪼개고,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것을 능력이라 부른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구호가 세상을 뒤덮고 있다. 그 결과는 어떤가? 그대들은 만성적인 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번아웃'이라는 이름의 탈진 상태에 시달린다. 그대들은 더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 더 많이 '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정반대로 말한다. 진정으로 위대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많이 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무위(無爲)의 기술이다. 무위는 게으름이 아니고, 억지로 힘을 주어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고 금방 지치게 된다. 하지만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힘들이지 않고도 멀리 갈 수 있다. 무위는 바로 이 흐름에 올라타는 기술이다. 내가 이야기했던 백정  '정(丁)'을 기억하는가? 그는 19년 동안 소를 잡았지만 칼날이 무뎌지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뼈와 살을 자르지 않았다. 소의 몸에 있는 본래의 빈 공간, 그 자연스러운 결을 따라 칼을 움직였을 뿐이다. 그의 칼질은 힘든 노동이 아니라 우아한 춤이었다.

 

그대들의 삶은 어떤가? 수많은 문제와 과제 앞에서, 그대들은 백정 '정'처럼 그 사이의 빈 공간을 찾아 부드럽게 움직이는가. 아니면  뼈를 향해 무작정 칼을 내리쳐 칼날(그대들의 에너지)을 상하게 하고 있는가? 오늘 하루,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기를 시도해보라. 목적지 없이 걸어보라. 해야 할 일 목록을 잠시 잊어보라. 스마트폰을 꺼두고, 그저 창밖의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라. 처음에는 불안하고 초조할 것이다. 무언가 뒤처지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 불안한 시간을 견디고 나면, 그대들의 마음에 고요한 공간이 생겨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공간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난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문제의 진정한 본질이 보인다. 가장 생산적인 행위는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다. 멈춤의 기술이야말로, 지쳐버린 그대들의 시대를 구원할 가장 위대한 기술이다.

 

 쓸모없음의 축복

그대들의 사회는 쓸모(用)를 숭배한다. 모든 사람과 사물은 그 쓸모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 "그것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그 사람은 무엇을 할 줄 아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존재는 쓸모없는 것으로 낙인찍히고 소외된다. 그대들은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한다.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가르치고, 쉬는 시간마저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채워 넣는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 쓸모 있음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곧고 단단한 나무는 가장 먼저 베어져 대들보나 관짝이 된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온갖 궂은일에 불려 다니느라 자신의 삶을 돌볼 틈이 없다. 나는 쓸모없는 가죽나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목수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을 만큼 못생기고 구불구불한 나무. 하지만 그 쓸모없음 덕분에 그 나무는 도끼날을 피할 수 있었고, 수백 년을 살아남아 거대한 그늘을 드리우는 쉼터가 되었다. 그 나무에게는 쓸모없음이 곧 가장 큰 쓸모(無用之用)였던 셈이다.

하루를 무위의 행복으로 즐기는 부부

 

그대들 자신을 돌아보라. 그대들 안에도 세상의 기준으로는 쓸모없는 부분들이 있지  않은가? 돈벌이가 되지 않는 취미, 남들에게 자랑할 수 없는 엉뚱한 공상, 아무런 생산성 없는 멍하니 보내는 시간, 그대들은 이런 시간과 재능을 부끄러워하고 낭비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쓸모없는 부분에 그대들의 진정한 개성과 자유가 숨 쉬고 있다. 그 쓸모없는 시간 속에서 그대들의 영혼은 비로소 휴식하고, 그 엉뚱한 공상 속에서 그대들의 상상력은 날개를 편다. 모든 것이 효율과 생산성의 잣대로 평가받는 세상에서, 기꺼이 쓸모없는 사람이 될 용기를 가져라. 쓸모없음을 즐겨라. 그것이야말로 그대들을 모든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그대 자신만의 고유한 향기를 지키게 하는  지혜다. 쓸모없음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흐르는 강물은 

그대들은 지식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대들은 안다는 것에 큰 가치를 둔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더 지혜롭고 유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수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이 진정한앎 일까? 그대들은 맛집에 대한 수많은 리뷰를 읽고 별점을 분석하지만, 정작 자기 혀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잊어버린다. 그대들은 연애에 대한 수많은 심리학 이론을 공부하지만, 정작 눈앞의 사람의 마음을 느끼는 데는 서툴다.

물고기는 유체역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헤엄치는 법을 안다. 새는 공기역학을 배우지 않아도 나는 법을 안다. 그것은 머리로 아는 지식(知)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한 지혜(慧)다. 진정한 앎은 분석하고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대들이 가진 지식과 정보는 대부분 개념의 세계에 속한다. 사랑, 행복, 자연이라는 이름표를 만들어 붙이고, 그것을 다 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이름표는 실체가 아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

순행하는 물고기들

 

때로는 그대들의 똑똑한 머리를 쉬게 하라. 분석과 판단을 멈추고 그저 느껴보라. 저것은 무슨 꽃일까?라고 검색하기 전에, 그저 꽃의 색과 향기와 감촉을 온전히 느껴보라. 이 감정은 왜 생겼을까? 라고 분석하기 전에, 그저 그 감정이 내 안에서 흘러가도록 지켜보라. 세상은 그대들의 머릿속에 들어갈 만큼 작지 않다. 진짜 지혜는 텅 빈 마음에서 온다. 텅 빈 마음만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그저 흐름을 느끼며 살아는 가는것,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진짜 앎의 길이다.

 

기계가 아닌 그대

그대들은 자신의 몸을 대하는 방식이 참으로 기묘하다. 어떤 때는 기계처럼 취급하고 어떤 때는 감옥처럼 여긴다. 그대들은 몸을 성능을 높여야 하는 기계처럼 다룬다.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카페인으로 채찍질하고, 더 보기 좋은 몸을 만들기 위해 혹독하게 굶거나 무리하게 운동한다. 몸이 보내는 피로와 통증의 신호는 무시하고, 정해진 스케줄에 몸을 억지로 끼워 맞춘다. 몸은 그저 나의 정신, 나의 의지를 담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몸은 기계가 아니다. 몸은 그 자체로 지혜로운 우주다. 몸은 언제 쉬어야 할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를 스스로 안다. 몸은 그대들의 감정을 기억하고, 그대들이 겪은 모든 경험을 담고 있다. 정신과 몸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두 개의 가지와 같다.

 

그대들의 몸이 보내는 조용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공기가 몸속을 드나드는 감각을 느껴보라. 굳어있는 어깨와 등을 알아차리고 부드럽게 움직여 보라. 몸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존중하라. 피곤하면 쉬고,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라. 이 얼마나 간단하고 자연스러운 이치인가. 몸을 혹사하는 것은 뿌리를 갉아 먹는 것과 같다. 그대들의 영혼이 머무는 유일한 집인 몸을 아끼고 존중하라. 몸이 편안할 때, 마음도 함께 고요해진다. 진정한 평화는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춤출 때 찾아온다.

 

자연의 균형 찾기

우리가 살던 시대에도 인간은 자연을 이용했지만, 그대들처럼 자연을 정복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대들은 산을 깎아 길을 내고, 강을 막아 댐을 만들며, 땅을 파헤쳐 그 속의 모든 것을 꺼내 쓴다. 마치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무한한 창고인 것처럼, 그대들은 스스로 자연의 주인이라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도(道)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작은 일부일 뿐이다. 인간은 숲속의 수많은 나무 중 하나이며, 강물의 수많은 물방울 중 하나다.

자연의 재앙, 자연의 복수

 

그대들이 오늘날 겪고 있는 기후의 변화, 잦아지는 재앙, 사라지는 생명들을 보라. 그대들은 이것을 자연의 재앙 혹은 자연의 복수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균형을 잃은 자연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려는 몸부림일 뿐이다.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진 저울이 반대쪽으로 크게 튀어 오르는 것과 같다. 강물은 어떤 장애물을 만나도 결국 바다로 가는 길을 찾아낸다. 그대들이 아무리 높은 댐을 쌓아도, 언젠가 물은 그 댐을 넘거나 돌아서 흐를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힘이고, 도의 섭리다. 이제 그만 자연과 싸우는 것을 멈추라.  그대들은 자연을 이길 수 없다. 자연을 지배하려는 교만을 버리고, 자연의 일부로서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라.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에도 도가 깃들어 있음을 기억하라. 그대들이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이 바로 그대들의 생명과 연결된 도의 숨결임을 잊지 말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야말로 그대들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다.

 

그대들이 만들어낸 적(敵)

그대들의 세상은 참으로 많은 금을 긋고 사는 듯하다. 우리 편과 저쪽 편, 옳은 것과 틀린 것, 선과 악, 진보와 보수. 그대들은 이처럼 세상을 둘로 나누고, 자신이 속하지 않은 반대편을 향해 맹렬히 돌을 던진다. 하지만 그대들이 싸우고 있는 그 적은 과연 실재하는가?  그것은 그대들의 뇌가 만들어낸 허상은 아닌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의 현장

 

빛이 있기에 어둠이 있고, 긴 것이 있기에 짧은 것이 있다. 높음과 낮음,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이처럼 서로 기대어 존재한다. 하나를 없애면 다른 하나도 사라진다. 이것이 도의 이치다. 그대들이 악이라고 부르는 것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그 안에서 그대들이 선이라 부르는 것의 씨앗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대들이 적이라고 부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면, 그 안에서 나의 모습과 닮은 고통과 슬픔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구별과 이름표를 잠시 내려놓아 보라.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완고한 생각을 버려라. 옳고 그름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는 것을 멈출 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커다란 마음이 생긴다. 다툼은 사라지고 조화가 찾아온다. 가장 지혜로운 물은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어진다. 어떤 모양도 고집하지 않기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그대들의 마음도 물처럼 되어라. 모든 경계를 허물고 유연하게 흐를 때, 그대들은 더 이상 세상과 싸울 필요가 없게 된다.

 

마지막 속삭임

우리의 긴 이야기도 이제 끝을 맺을 시간이다. 우리가 한 이야기는 정답이 아니다. 그저 다른 관점일 뿐이다.  이 이야기마저도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좋다. 나는 언젠가 꿈에서 나비가 되어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녔다. 너무나 생생하고 즐거워서, 내가 장주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아니면 지금 나비가 나라는 인간이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무용지용, 무위의 행복

 

그대들, 21세기의 바쁜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더 많은 것을 이루고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치열한 꿈을 꾸고 있는가? 혹시 그 모든 것이 한바탕의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가? 우리가 그대들에게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삶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 삶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즐겨야 할 놀이다.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할 것이다.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플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그저 거대한 도(道)의 흐름 속에서 피어났다 지는 구름과 같다. 그러니  이제 그만 달리기를 멈추라. 그만 애쓰기를 멈추라. 그대들은 이미 완전하고, 이미 충분하다. 그대들 존재 자체가 기적이고, 도의 아름다운 표현이다. 길은 멀리 있지 않다. 도는 그대들 안에 있다. 그대들의 고요한 숨결 속에, 발밑의 흙냄새 속에, 무심코 마시는  차 한 잔의 온기 속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 속에 도가 흐르고 있다. 부디,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흔들며 노는 거북이의 자유를 누리기를  바란다. 쓸모없는 나무 그늘에서 달콤한 낮잠을 즐기는 여유를 찾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그대들 자신만의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오르는 꿈을 꾸기를 기대한다.







TOP

Designed by 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