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다. 나는 내 스승 플라톤처럼 고결한 '이데아'의 세계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땅에 발을 딛고, 내 눈으로 만물을 관찰하여 내 손으로 분류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철학자이자 생물학자였고, 물리학자였으며 논리학자였다. 내게 철학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잘 살아가는' 구체적인 기술이었다. 나는 이천사백년의 시간을 건너 너희의 세계를 본다. 나는 너희의 기술에 놀라지 않는다. 그것은 물질과 운동에 대한 지식이 모인 당연한 결과이다. 나는 너희의 '사상'에 놀라지도 않는다. 인간의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길을 맴돌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놀라고, 또 우려하는 것은 너희가 '잘 사는 법'을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물질적 조건을 갖추었다. 하지만 너희의 얼굴에는 기쁨보다 불안이, 풍족함보다 공허함이 더 짙게 서려 있다. 너희는 행복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행복이 아닌 것을 향해 전력 질주하고 있다. 나는 의사처럼 너희의 삶을 진단하려 한다. 생물학자처럼 너희의 행동을 분류하고, 논리학자처럼 너희의 오류를 증명하려 한다. 나의 목적은 비난이 아니다. 처방이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서 가장 훌륭하게, 가장 충만하게, 즉 에우다이모니아에 이를 수 있는지, 그 현실적인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너희 삶에 대한 가장 실용적인 탐구다. 이제 나의 진단과 처방을 시작하겠다. 부디 인내심을 갖고 들어보길 바란다. 너희의 삶 전체가 걸린 문제이니 말이다.
1. 행복이란 무엇인가?
너희의 모든 문제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잘못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너희는 행복이 '즐거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짜릿한 쾌감, 편안한 휴식, 달콤한 만족감. 그래서 너희는 쾌락을 주는 것들을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더 자극적인 영상, 더 맛있는 음식, 더 편안한 소파, 더 많은 '좋아요'. 내가 묻겠다. 소는 어떤가? 소도 풀을 뜯으며 만족감을 느끼고, 따스한 햇볕 아래서 편안함을 느낀다. 만약 행복이 단지 쾌락이라면, 인간의 삶의 목적이 소의 삶의 목적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쾌락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고 일시적이다. 그것은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일 뿐, 너희 영혼의 활동이 아니다. 쾌락은 갈증과 같아서, 마실수록 더 큰 갈증을 불러온다. 너희가 스크린을 아무리 넘겨봐도, 쇼핑을 아무리 해도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는 이유다. 너희는 쾌락을 좇고 있지만, 그것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물론 쾌락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훌륭한 삶에는 즐거움이 따른다. 하지만 즐거움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목적을 향해 잘 나아가고 있을 때 따라오는 '부산물'에 가깝다. 너희는 부산물을 목적으로 착각하고, 평생 그림자만 좇고 있다. 이것이 너희의 첫 번째 진단이다.
2.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그렇다면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에우다이모니아'라고 불렀다. 이 단어는 단순히 '행복'이라고 번역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번영', '훌륭하게 잘 사는 상태', '잠재력의 완전한 실현'을 의미한다. 이것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다. 삶 전체에 걸친 '활동(activity)'이다. 도토리를 생각해 보라. 도토리의 목적, 즉 '텔로스(telos)'는 거대한 참나무가 되는 것이다. 도토리는 땅에 심겨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고, 비바람을 견디며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펼쳤을 때, 그 목적을 달성한다. 도토리의 '에우다이모니아'는 참나무가 되는 활동 그 자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에우다이모니아'는 인간 고유의 기능을 최고로 발휘하며 살아가는 활동이다. 그것은 가만히 앉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는 삶은 에우다이모니아가 아니다. 그것은 식물의 삶에 가깝다.
3. 인간의 고유한 기능은?
그렇다면 인간을 식물이나 다른 동물과 구별 짓는 고유한 기능은 무엇인가? 먹고 자는 것? 그것은 식물도 한다. 감각하고 움직이는 것? 그것은 동물도 한다.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기능, 그것은 바로 '이성(logos)'이다. 우리는 사유하고, 추론하고, 판단하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따라서 인간의 '에우다이모니아'는 '이성의 원리에 따라 덕(arete)을 발휘하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말이 어렵게 들리는가? 간단히 말하겠다. 너의 이성적 능력을 사용하여, 너의 잠재력을 최고 수준으로 발휘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너의 삶의 목적이다. 쾌락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너를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하게, 즉 '번영하게' 만들 것이다. 이제 그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보자. 에우다이모니아가 '덕을 발휘하는 활동'이라면, '덕(arete)'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덕'은 '탁월성'을 의미한다. 바이올리니스트의 덕은 뛰어난 연주 실력이고, 경주마의 덕은 빠르게 달리는 능력이다. 인간의 덕은 훌륭한 성품과 지혜다.
4. 성품이 운명이다, 습관의 힘
너희는 '인생은 한 방'이라고 말하거나,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변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착각이다. 훌륭한 성품은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습관'을 통해서만 형성된다. 우리는 용감한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된다. 우리는 절제하는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절제하는 사람이 된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
수영을 책으로만 배울 수 없는 것과 같다. 물에 들어가 팔다리를 저어야만 수영을 배울 수 있다. 성품도 마찬가지다. '선(善)'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선한 행동을 꾸준히 실천해야만, 그것이 제2의 천성처럼 너의 성품이 된다. 너희가 매일 반복하는 행동을 보라. 그것이 바로 너희의 미래 모습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의미 없이 스크린을 넘기는 습관은 너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고, 남을 비방하는 댓글을 다는 습관은 너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 반면, 시간을 내어 공부하는 습관은 너의 지성을,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습관은 너의 인정을 탁월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 그 자체다. 그러므로 탁월함은 행동이 아닌, 습관이다." 이 말을 뼈에 새겨라. 너의 삶을 바꾸고 싶다면, 너의 습관을 바꿔라. 그것이 유일한 길이다.
5. 중용(Mesotes), 극단의 황금률
'덕' 있는 행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인가? 나는 그것이 두 극단 사이의 중용(Golden Mean)에 있다고 말했다. 모든 감정과 행동에는 지나침(excess)과 모자람(deficiency)이라는 두 가지 악덕이 있고, 그 정중앙에 '중용'이라는 덕이 존재한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생각해보자. 두려움이 모자란 상태는 만용(Rashness)이라는 악덕이다. 무모하게 위험에 뛰어드는 것이다. 두려움이 지나친 상태는 비겁(Cowardice)이라는 악덕이다. 마땅히 맞서야 할 때 도망치는 것이다. 그 사이의 중용이 바로 용기(Courage)다.

두려움을 느끼지만, 이성의 판단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쾌락이라는 감정을 생각해 보자. 쾌락을 지나치게' 탐닉하는 것은 방종(Profligacy)이다. 쾌락을 '지나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무감각(Insensibility)이다. 그 사이의 중용이 절제(Temperance)이다. 너희의 세계는 이 중용의 지혜를 잃어버렸다. 모든 것이 극단으로 치닫는다. 정치에서는 극단적인 이념 대립만이 존재한다. 건강 문제에서는 굶는 다이어트(모자람)와 폭식(지나침) 사이를 오간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열광적인 찬양(지나침)과 끔찍한 비난(지나침)만이 목소리를 얻는다. 중용은 단순히 산술적인 중간이나 어정쩡한 회색지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올바른 때에, 올바른 것에 대해, 올바른 사람에게, 올바른 동기로, 올바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고도의 지혜를 요구한다.
6. 프로네시스(Phronesis)
그렇다면 그 올바른 때와 방식, 즉 중용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지적 덕이 바로 프로네시스(Phronesis), 즉 실천적 지혜다. 프로네시스는 책으로 배우는 이론적 지식(episteme)과 다르다. 그것은 삶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판단하는 능력이다. 마치 뛰어난 항해사가 이론뿐만 아니라 바람과 파도, 별자리를 읽는 경험을 통해 배를 안전하게 이끄는 것과 같다.
너희 시대는 데이터와 매뉴얼을 맹신한다. 하지만 삶의 모든 문제에 정해진 답은 없다. 어떤 상황에서는 정의가, 다른 상황에서는 자비가 더 중요한 덕이 될 수 있다. 친구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용기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침묵하는 것이 더 현명한 우정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이 미묘한 차이를 파악하고 최선의 행동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바로 프로네시스다. 프로네시스는 어떻게 얻는가?
첫째, 삶의 경험을 통해 얻는다.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통해 배운다. 둘째, 훌륭한 사람(프로니모스, phronimos)을 관찰하고 모방함으로써 배운다. 너희 주변에 지혜롭고 덕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는지를 배우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다. 셋째, 올바른 습관을 통해 덕 있는 성품을 갖추면, 자연스럽게 올바른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커진다.
지식만 많은 괴물이 되지 마라. 경험을 통해, 그리고 성찰을 통해 너의 '프로네시스'를 길러라. 그것이야말로 너희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 가장 중요한 나침반이다. 이제 우리는 에우다이모니아라는 목적지와, 습관, 중용, 프로네시스라는 도구를 얻었다. 이것을 실제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7. 정치적 동물
너희 시대의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는 인간이 홀로 완성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자수성가, 독립적인 삶을 동경한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거스르는 것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다. "이 말은 우리가 폴리스(polis), 즉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때만 비로소 인간다워진다는 뜻이다. 언어, 이성, 도덕성은 모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고 발전할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는 혼자 살아남았을 뿐, 인간으로서 번영하지는 못했다. 너희의 '에우다이모니아'는 결코 혼자서 달성될 수 없다. 훌륭한 법과 제도를 가진 공동체 안에서, 좋은 친구들과 교류하며,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만 가능하다. 너희의 극단적인 개인주의는 너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외롭게 하고 너희의 영혼을 왜소하게 만들고 있다. 공동체에 참여하라. 너희가 사는 동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국가의 미래를 토론하고, 시민의 의무를 다하라. 너의 번영은 공동체의 번영과 분리될 수 없음을 기억하라.
8. 목적론적 삶
나는 모든 것에는 '목적(telos)'이 있다고 말했다. 너희 삶의 궁극적 목적은 에우다이모니아다. 그렇다면 너희의 개별적인 활동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들이 궁극적 목적에 기여하고 있는가? 너의 직업을 생각해보라. 너는 왜 그 일을 하는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인가?(이것은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그 일이 너의 잠재력을 발휘하게 하는가? 타인과 공동체에 기여하는가? 너를 덕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너는 너의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을 목적 없이 허비하고 있다. 너의 취미 활동을 생각해보라. 너는 왜 그것을 하는가? 단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 활동이 너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치고, 정신을 고양시키고, 훌륭한 사람들과 교류하게 만드는가?

너의 모든 활동을 목적의 관점에서 점검하라. 마치 뛰어난 장군이 모든 전투를 최종적인 '승리에 맞춰 계획하듯, 너의 하루하루를 '에우다이모니아'라는 궁극적 목적에 맞춰 설계하라. 목적 없는 삶은 표류하는 배와 같다.
9. 아리스토텔레스의 안내서
이제 나의 도구들을 가지고 너희 시대의 몇 가지 구체적인 문제들을 분석하고 처방을 내려보겠다. 나는 논리학, 즉 올바른 추론의 규칙을 체계화했다. 너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정보에 노출되어 있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거짓 정보에 시달리고 있다. 나의 논리학과 수사학은 이 정보의 늪을 항해하는 지도가 될 것이다. 너희가 어떤 주장을 접했을 때, 세 가지를 살펴라.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 로고스(논리)는 그 주장의 논리적 구조는 타당한가? 근거는 사실인가? 성급한 일반화나 흑백논리와 같은 오류는 없는가? 파토스(감정)는 그 주장이 너의 어떤 감정을 자극하고 있는가? 공포, 분노, 연민? 감정에 휩쓸려 논리적 판단을 흐리고 있지는 않은가? 선동가들은 항상 로고스가 아닌 파토스에 호소한다. 에토스(품성)는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신뢰할 만한 품성과 전문성을 갖추었는가? 그의 과거 행적은 그의 말을 뒷받침하는가? 이러한 세 가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라. 그러면 너희는 거짓 선동과 의미 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10. 스크린의 카타르시스
나는 『시학』에서 비극이 어떻게 관객의 마음에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통해 감정의 정화, 즉 '카타르시스(catharsis)'를 경험하게 하는지 분석했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우리의 감정을 순화시키고, 인간 조건에 대한 통찰을 주어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너희의 영상 매체들도 그러한가? 어떤 훌륭한 영화나 드라마는 분명 비극처럼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너희에게 깊은 성찰의 기회를 줄 것이다. 이것은 예술의 올바른 사용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오락은 어떤가? 단순히 자극적인 쾌락을 제공하여 너희의 시간을 빼앗고, 너희를 현실의 문제로부터 도피하게 만들지 않은가? 그것은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마취제다.
너희의 여가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스스로 관찰하라. 너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예술을 선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너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오락에 중독되어 있는가?
여가(schole)는 원래 학문'이나 자기계발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너희의 여가를 낭비하지 마라. 그것은 너의 영혼을 성장시킬 가장 좋은 기회다. 나는 너희에게 '에우다이모니아'라는 삶의 궁극적 목적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목적에 이르는 길은 쾌락의 추구가 아니라, 이성에 따라 덕을 실천하는 활동임을 논증했다. 그 실천의 방법론으로 습관의 중요성, 중용의 지혜, 그리고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의 역할을 설명했다. 이제 모든 것이 너희 손에 달렸다. 너의 삶은 하나의 예술 작품과 같다. 너희는 그 작품을 조각하는 예술가이며, 동시에 작품의 재료가 되는 대리석이다. 매일매일 너희가 하는 선택과 행동이 조각칼이 되어 너의 성품이라는 대리석을 깎아나간다.
무절제하고 비겁한 행동은 너의 작품에 흠집을 낸다.절제하고 용기 있는 행동은 너의 작품을 더 아름답고 조화롭게 만든다. 이것은 평생에 걸친 작업이다.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때로는 실수하고, 흠집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정을 쪼아 나가는 것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너의 잠재력이라는 원석을 깎아, 덕과 이성이 빛나는 완벽한 조화의 인간상, 즉 '에우다이모니아'를 실현한 걸작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 길은 쉽지 않다. 쾌락이라는 저급한 길보다 더욱 많은 노력과 훈련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것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하고도 가장 영광스러운 길임은 틀림이 없다. 오직 이 길의 끝에만 찰나의 쾌감이 아닌, 흔들리지 않는 깊고 충만한 번영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너의 조각칼을 들어라. 그리고 너의 삶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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