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에 오는 사람들은 부모의 학대 여부를 부정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때리지 않았어요, 학대하지 않고 잘 키워주셨어요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아동 학대라고 하면 물리적인 폭력이나 심각한 방임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의 견해는 다릅니다. 미국의 임상심리학자 조니스 웹(Jonice Webb) 박사는 저서 <거부당한 마음, Running on Empty>에서 아동기 정서적 방임(Childhood Emotional Neglect, CEN)을 아이의 상처로 이야기합니다.

정서적 방임은 부모가 아이의 감정적 욕구에 적절히 반응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속상한 일을 겪은 아이에게 별거 아니야, 뚝 그쳐라고 말하거나 성적표 외에는 아이의 마음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너무 바쁜 나머지 아이가 어떻게 하던지 모르고 부모의 일에 집중하는 태도입니다. 정서적 방임은 눈에 보이지 않고 기억에 남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이러한 아픔을 겪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성인이 됩니다. 그런 데 이런 경험을 가진 아이는 성장해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웹 박사의 설명입니다. 정서적 방임을 겪은 아이는 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거나 신뢰하지 못하고, 공허함, 단절감, 충족되지 않는 느낌을 자주 가지며, 타인에게 의지하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자기 규율이나 자기 돌봄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건부 사랑과 거짓 자아의 탄생
내면 아이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처 중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아닌 행위의 결과로 평가받는 것입니다. 이를 조건부 사랑이라고 합니다. 2018년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드라마 <SKY 캐슬>은 이러한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극 중 영재나 예서 같은 아이들은 부모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대리물로 그려집니다. 부모는 너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내가 1등을 해야만 엄마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챕니다.

영국의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도널드 위니콧(Donald Winnicott, 1896 ~1971)은 이 과정에서 거짓 자아(False Self)가 탄생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사랑받기 위해 본래의 생기발랄한 자아를 숨깁니다. 대신 부모가 원하는 순종적이고 성과 지향적인 가면을 씁니다. 겉으로는 모범생이고 효자일지 모르지만 그 안의 내면 아이는 질식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의 함정
흔히 어른스러운 아이, 손이 안 가는 아이라고 칭찬받던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리학자 앨리스 밀러(Alice Miller, 1923~2010)는 그녀의 저서 <천재가 된 영재들의 드라마>에서 이를 깊이 있게 다루었습니다.

앨리스 밀러는 1923년 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939년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그녀와 가족은 피오트르쿠프 게토에 강제 수용되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16세였고 게토에서의 삶은 극도로 위험하고 제한적이었습니다. 밀러는 게토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非)유대인 이름을 사용하며 탈출 계획을 세웠고, 결국에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게토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폴란드어를 사용하지 못해 위장이 어려웠기 때문에 함께 탈출하지 못했고, 1941년 게토에서 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녀는 탈출 후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바르샤바의 가톨릭 수도원에 숨겼으며, 여동생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 여동생을 가톨릭으로 세례받게 합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난 뒤 1946년 스위스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심리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저서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존 경험과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바탕이 되었죠. 앨리스 밀러는 자신의 생존 경험을 바탕으로, 어린 시절의 진실을 억압하는 것이 평생의 고통을 만든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녀의 대표작인 <영재의 드라마, The Drama of the Gifted Child>는 바로 이러한 통찰의 결과물입니다.

그녀는 부모의 정서적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억압하며 자란 아이들의 비극을 지적합니다. 이들은 부모의 기분을 살피느라 눈치를 보는 아이로 성장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착한 아이 콤플렉스(Good Child Syndrome)입니다. 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보다 상대방의 기분을 우선시합니다. 겉보기에는 원만한 성격 같지만, 내면은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공허한 상태가 지속됩니다.

내면화된 독성 수치심
존 브래드쇼는 이러한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핵심 감정을 독성 수치심(Toxic Shame)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죄책감이 내가 무언가 잘못했다는 행동에 대한 반성이라면, 수치심은 나라는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존재에 대한 부정입니다. 너는 왜 그 모양이야! 너만 없으면 우리 집이 편할 텐데와 같은 부모의 언어폭력, 혹은 차가운 침묵은 아이의 내면에 독처럼 스며듭니다. 이렇게 형성된 독성 수치심은 성인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내면의 비판자가 됩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해도 마음 한구석에서 나는 못난 놈이다, 사람들이 나의 진짜 모습을 알면 나를 외면할거다 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의 정체가 바로 이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현재의 착한 아이 콤플렉스나 정서적 결핍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돌아볼 수 있는 [아동기 정서적 방임 자가진단 체크리스트]를 아래에 제시하였습니다. 진단을 통해서 과거의 방임여부를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동기 정서적 방임 체크리스트 (CEN: Childhood Emotional Neglect)
아래 항목 중 본인에게 해당되는 내용이 있는지 천천히 읽어보며 체크해 보세요.
| 번호 | 체크 항목 | 예 | 아니오 |
| 1 | 어린 시절, 부모님께 내 고민이나 힘든 점을 털어놓기 힘들었나요? | □ | □ |
| 2 | 가족과 함께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더 편안함을 느꼈나요? | □ | □ |
| 3 | 부모님은 내 감정보다 학업 성적이나 예의 바른 행동에 더 관심이 많으셨나요? | □ | □ |
| 4 | 슬프거나 화가 났을 때, 위로받기보다 "별일 아니야" 혹은 "참아야지"라는 말을 들었나요? | □ | □ |
| 5 | 부모님이 너무 바쁘거나 힘들어 보여서 내 어려움을 숨긴 적이 많나요? | □ | □ |
| 6 | 부모님으로부터 따뜻한 포옹이나 "사랑한다", "고생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드문가요? | □ | □ |
| 7 | 집안에서 내 의견이 존중받기보다 부모님의 결정에 무조건 따라야 했나요? | □ | □ |
| 8 | 어린 시절의 기억이 유독 가물가물하거나, 떠올리면 공허한 기분이 드나요? | □ | □ |
| 9 | 성인이 된 지금,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죄책감이 드나요? | □ | □ |
| 10 | 내 욕구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타인의 기분을 맞추는 것이 더 익숙한가요? | □ | □ |
진단 결과는 아래의 기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5개 해당: 아동기에 정서적으로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재의 착한 아이 성향이 여기서 비롯된 것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6개 이상 해당: 성장 과정에서 정서적 방임을 경험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습관화되어 내면의 공허함이 클 수 있습니다..

왜곡된 거울 깨뜨리기
우리는 처음에 부모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봅니다. 부모가 따뜻하게 반응해주면 나는 소중한 사람이 되고, 부모가 무관심하거나 비난하면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 됩니다.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찌그러지거나 깨진 거울을 보고 자란 셈입니다. 부모의 비난을 듣고 자란 아이들인 것이죠.
행복과의 관련성은 여기서 명확해집니다. 행복은 스스로를 긍정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왜곡된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한, 진정한 자기 긍정은 어렵습니다. 따라서 치유의 시작은 내 잘못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저 거울이 왜곡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2부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핵심입니다.

다음은 제3부에서 만나겠습니다. 3부에서는 이러한 과거의 상처가 현재 성인의 삶에서 어떤 파괴적인 행동 패턴으로 나타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즉 성인기에 작동하는 파괴적 각본, 증상과 방어기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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