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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데카르트 철학의 핵심(2)

by 행복 리부트 2025. 12. 2.

뼛속까지 시린 겨울, 그리고 난로

1619년 겨울이었다. 독일의 남부, 노이부르크(Neuburg)라는 곳의 추위는 매서웠다. 당시 전쟁의 포화가 유럽을 휩쓸고 있었다. 30년 전쟁이었다. 젊은 청년 데카르트는 군대에 몸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총보다 생각과 싸우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너무 추워서 벽난로라고 불리는 난방이 된 작은 방 안에 틀어박혔다. 하루 종일 그곳에 있었다. 밖은 혼란스러웠다. 구교와 신교가 싸웠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의 이단이 되었다.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데카르트는 난로의 온기를 느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결심했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기로 했다.

썩은 사과를 골라 내는 데카르트, 제미나이

 

썩은 사과 골라내기

데카르트는 완전히 뒤 엎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을 하나의 사과 바구니로 비유했다. 바구니 안에 썩은 사과가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된다. 그 썩은 사과가 멀쩡한 다른 사과들까지 망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지식을 쌓아 간다. 학교에서 배운 것, 책에서 읽은 것, 어른들에게 들은 것 등 지식도 다양하다. 하지만 그중에 거짓이 섞여 있다면? 그 거짓 지식 위에 쌓은 나의 신념은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과격한 방법을 택했다. 사과를 하나씩 검사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그는 바구니를 아예 뒤집어 엎기로 했다. 모든 사과를 바닥에 쏟아버리는 것이다. 즉,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일단 거짓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확실한 것, 절대로 썩지 않을 싱싱한 사과 하나만 찾아서 다시 바구니에 담기로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방법적 회의의 시작이었다.

 

감각의 배신

가장 먼저 의심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은 감각이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을 믿는다. 내 눈으로 직접 봤어라는 말은 진실의 보증수표처럼 쓰인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물이 든 컵에 젓가락을 넣어보라. 젓가락은 휘어져 보인다. 하지만 꺼내보면 곧다. 멀리 있는 탑은 둥글게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네모날 수도 있다. 감각은 우리를 속인다. 한 번이라도 나를 속인 적이 있는 친구는 완전히 믿을 수 없다. 감각도 마찬가지다. 더욱 무서운 의심이 이어졌다. 바로 꿈이다. 어젯밤 꿈속에서 나는 하늘을 날았다. 꿈꾸는 동안에는 그것이 진짜라고 믿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난로 앞에서 글을 쓰고 있는 이 현실이 사실은 아주 긴 꿈이라면? 꿈과 현실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확실한 표징이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없었다. 지금 이 순간도 꿈일 수 있다. 감각적 경험은 모두 무너져 내렸다.

 

감각을 믿지 못하는 데카르트, 제미나이

 

감각을 버렸다. 꿈도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수학은 어떨까? 2 더하기 3은 5다. 사각형의 내각의 합은 360도다. 내가 꿈을 꾸든 깨어 있든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상상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만약 전지전능한 신이 나를 속이고 있다면? 아니, 신은 선하니까 그럴 리 없다. 그렇다면 정말 교활하고 강력한 악마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악마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이고 있다. 하늘, 공기, 땅, 색깔, 모양, 소리 모든 것이 악마가 만든 환상이다. 심지어 2 더하기 3을 할 때마다 악마가 내 머릿속을 조작해서 5라고 믿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정답은 6인데 말이다. 섬뜩한 상상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가정 하에서는 수학적 진리조차 안전하지 않다. 세상 모든 것이 악마의 연극일 수 있다. 데카르트는 절망적인 고독 속에 빠졌다. 발밑의 땅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확실한 것은 단 하나도 없어 보였다.

 

 아르키메데스의 점

고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는 말했다. "나에게 단단한 지지점 하나만 주시오. 그러면 지구를 들어 올리겠소." 데카르트에게도 그 지지점이 필요했다. 모든 것이 거짓이라 해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단 하나의 진리, 그것만 찾으면 무너진 세상을 다시 세울 수 있다. 그는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끝없는 의심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그때, 번개 같은 깨달음이 스쳤다.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다. 세상이 가짜라고 의심한다. 내 몸이 없다고 의심한다. 수학도 틀렸다고 의심한다. 그런데, 이렇게 의심하고 있는 나는 대체 무엇인가? 악마가 나를 속인다고 치자. 속임을 당하려면, 속임을 당하는 대상인 나가 있어야 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악마는 나를 속일 수조차 없다. 꿈을 꾸기 위해서도 꿈꾸는 내가 있어야 한다. 환상을 보기 위해서도 보는 내가 있어야 한다.

 

코기토 에르고 숨

의심은 곧 생각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생각하는 행위가 일어나는 순간, 그 주체인 나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내가 밥을 먹는다는 것은 거짓일 수 있다 (꿈일 수 있으니까). 내가 걷는다는 것도 거짓일 수 있다 (다리가 없는데 환상을 느끼는 것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거짓일 수 없다.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데카르트는 외쳤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썩지 않는 사과다. 악마가 아무리 나를 속이려 해도, 속고 있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훼손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이 명제를 철학의 제1원리로 삼았다. 드디어 발을 딛고 설 단단한 기반을 확인한 것이다.

심신이원론을 생각 중인 데카르트, 제미나이

생각하는 갈대

나는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존재인가? 데카르트는 자신을 생각하는 사물이라고 정의했다. 팔다리가 없어도, 눈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나다. 하지만 생각이 멈추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나의 본질은 정신과 생에 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심신이원론이 나온다. 마음(정신)과 몸(물질)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실체라는 것이다. 마음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나눌 수도 없다. 반면 몸은 공간을 차지하고 부품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생각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중세 시대까지 몸은 영혼이 깃든 신성한 것이었다. 함부로 손대면 안 되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몸을 기계로 선언했다. 시계 태엽이 맞물려 돌아가듯 우리 몸도 혈관, 근육, 신경이 물리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 기계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과학의 족쇄를 풀어주었다. 몸이 기계라면 분해해 봐도 된다. 고장 나면 고치면 된다.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물론 문제는 남았다. 마음이 비물질이고 몸이 기계라면 도대체 이 둘은 어떻게 소통하는가? 내가 팔을 들어야지라고 마음먹으면(정신), 왜 물리적인 팔(물질)이 올라가는가? 유령이 기계를 조종하는 셈이다. 데카르트는 뇌 속의 송과선이라는 곳에서 이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했지만, 이는 훗날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다. 데카르트가 말한 송과선은 실제로는 호르몬을 분비하는 작은 기관이지만, 그의 철학 속에서는 영혼과 육체가 서로 소통하는 특별한 장소로 상징되었다. 쉽게 말해, 송과선은 데카르트가 찾은 마음과 몸의 연결고리였던 셈이다.

 

현대인에게 던지는 메시지

난로 앞에서 시작된 데카르트의 사색은 서양 철학의 흐름을 바꿨다. 그는 무조건 믿지 마라고 가르쳤다. 권위에 호소하지 말고, 전통에 기대지 말고, 너 자신의 이성으로 따져보라고 했다. 이것이 근대 정신의 탄생이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산다. 스마트폰을 켜면 수만 가지 뉴스와 지식이 쏟아진다. 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17세기의 혼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지금이야말로 데카르트가 필요하다.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해서 믿지 말자. 뉴스에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사실이라 여기지 말자. 한 번쯤은 멈춰 서서 방법적 회의의 채로 걸러내야 한다. 정말 그런가? 확실한 근거가 있는가? 라고 물어 봐야 한다. 생각하기를 멈추는 순간 우리의 존재도 멈출지 모른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우리는 더욱 깊은 사색이 필요하다. 요즘 한국의 정치처럼 가치가 흔들릴 때는 더욱 그러하다. 내가 생각할 때 비로소 내가 나의 주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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