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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마이모니데스가 전하는 행복 메시지(4)

by 행복 리부트 2025. 11. 7.

나의 이름은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본명은 모세 벤 마이몬이지만, 사람들은 존경의 의미로 람밤(Rambam)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는 이미 주어진 길 위에서, 갈림길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들,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길잡이일 뿐이다. 내가 보니, 그대들의 시대에도 방황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구나. 한 손에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거룩한 경전(經典), 즉 토라(Torah), 다른 한 손에는 이성의 빛나는 횃불, 즉 과학과 철학을 들고 서 있다. 그리고 이 둘이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신의 말씀이 문자 그대로 진리라면, 과학의 발견은 거짓이란 말인가? 과학이 세상의 작동 방식을 설명한다면, 이제 신앙은 불필요한 것이란 말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그대들의 영혼을 지치게 하고, 믿음과 지성 사이에서 방황하게 만드는구나.

 

나는 단언한다. 진실로 창조주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는 결코 모순될 수 없다. 하나의 태양에서 나온 빛이 서로 다른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고 해서, 그 빛이 서로 다른 빛이 아니지 않은가. 만약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둘 중 하나, 혹은 둘 모두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역할은 의사와 같다. 나는 그대들의 눈에 낀 백내장을 제거하여 사물을 똑바로 보게 할 것이다. 나는 그대들의 신앙을 더욱 깊고 이성적인 이해 위로 올려놓으려 한다. 유치한 믿음에서 성숙한 믿음으로 그대들을 이끌려 한다. 그러니 나의 이야기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면서도, 이성적인 질문 앞에서 고뇌하는 정직한 영혼들을 위한 것이다.

마이모니데스, 제미나이

 

우리는 방금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 길을 잃은 방황하는 자의 모습을 보았다. 이제 그들을 위한 나의 첫 번째 안내를 시작한다. 모든 혼란의 시작은, 우리가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그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의 안내는, 바로 그 책, 토라(Torah)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음 장에서는 경전의 말씀이 어린아이를 위해서도 동시에 철학자를 위해서도 신비한 이야기를 하겠다.

 

경전은 동화책도 과학책도 아니다

방황하는 자들은 대부분 경전의 모든 말씀을 문자 그대로, 단 하나의 의미로만 읽으려는 데서 시작된다. 성스러운 토라는 두 개의 층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껍질이고 다른 하나는 속알맹이. 껍질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아직 이성적 훈련이 되지 않은 대중들을 위한 것이다. 그들의 신앙을 키우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가르침, 즉 어린아이를 위한 영양제와 같다. 하지만 그 껍질 안에는 단단하고 영양가 높은 속알맹이가 숨겨져 있다. 속알맹이는 심오하고 철학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이것은 이성을 단련하여 진리의 깊이를 탐구할 준비가 된 소수의 사람들,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경전은 종종 하느님을 을 가진 분노하고 후회하는 분으로 묘사한다. 만약 이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 전능하시고 완전하며 형태가 없으신 창조주를, 한낱 변덕스럽고 유한한 인간과 같은 존재로 격하시키는, 가장 큰 지적 오류이자 불경을 저지르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성은 신앙을 조롱하게 된다. 하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자는 알아야 한다. 이것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말씀하신 비유라는 것을 말이다. 하느님의 이란, 그분의 권능 혹은 행위를 뜻하는 비유다. 하느님의 이란, 그분의 지혜 혹은 섭리를 뜻하는 비유다. 하느님의 분노, 인간의 감정적 폭발이 아니라, 신의 법칙을 어겼을 때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를 뜻하는 비유다. 창조주께서는 이처럼 모든 수준의 사람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이중의 의미를 가진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어린아이는 이야기의 껍질을 먹으며 자라고, 어른은 그 안의 속알맹이를 소화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나의 첫 번째 안내는 이것이다. 경전을 읽되 문자의 감옥에 갇히지 마라. 문자 뒤에 숨겨진 깊고 합리적인 철학적 진리를 찾아내라. 그럴 때 비로서 이성과 신앙의 모순은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경전은 과학과 싸우기 위해 쓰인 책이 아니며 유치한 신화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책도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향한 가장 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는 암호문과 같다.

우리는 방금 경전이 문자 이상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속알맹이, 즉 철학적 이성으로 파악해야 할 신의 참모습은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함정에 빠지고 만다. 자신의 언어로 신을 그리려 하는 교만의 함정 말이다. 그렇다면,  이성의 빛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신은 과연 어떤 분인가놀랍게도, 우리가 그분에 대해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무엇이다가 아니라 무엇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신비로운 부정(否定)의 길을 함께 탐험해 보겠다.

 

신에 대한 가장 정직한 방법, 부정의 길

이제 우리는 인간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아슬아슬한 절벽의 끝에 섰다. 바로 신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우리의 모든 언어는 보고 만지는 이 세상의 사물들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크다, 강하다, 지혜롭다, 선하다이 모든 단어는 유한한 피조물의 속성을 나타낼 뿐, 창조주 자신의 본질을 설명할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신은 강하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무심코 인간 장수(將帥)의 힘을 떠올리게 된다.만약 우리가 신은 지혜롭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인간 현자(賢者)의 지혜를 상상하게 된다. 이것은 무한하고 완전한 신을 유한하고 불완전한 피조물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가장 큰 오류다. 긍정적인 속성을 신에게 덧붙일수록, 우리는 오히려 신의 완전한 단일성을 훼손하고,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진 존재처럼 만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묘한 형태의 우상숭배, 생각의 우상을 만드는 행위다. 그러므로 신에 대해 말하는 가장 정직하고 정확한 길은, 그분이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긍정의 길이 아니라 그분이 무엇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부정(否定)의 길이다. 이것은 마치 조각가가 거대한 돌덩이에서 조각상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조각가는 돌에 무언가를 덧붙여서 형상을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불필요한 부분들을 제거하고 깎아냄으로써  점차 본래의 형상을 찾아 간다.

 

우리는 신에게서 모든 피조물의 속성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야 한다. 신은 육체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물질성이라는 돌 조각을 떼어낸다. 신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시간성변화라는 돌 조각을 떼어낸다. 신은 여럿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다수성이라는 돌 조각을 떼어낸다. 신은 무지하지 않다 신은 무능하지 않다라고 말하며, 모든 결핍과 불완전함을 떼어낸다.이렇게 부정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면 우리의 언어와 생각은 마침내 침묵에 이른다. 그 어떤 피조물의 속성으로도 더 이상 규정할 수 없는, 순수하고 완전하며, 불가해한 존재 자체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성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경배다. 우리의 유한한 생각으로 무한한 신을 규정하려는 교만을 버리고, 그분의 불가해한 위대함 앞에 겸허히 침묵하는 것이 가장 참된 방식으로 신을 마주하게 되는 지혜이다.

 

이제 우리는 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올바른 길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토록 위대하고 불가해한 신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어떤 모습인가? 그대의 탐구는 이제 신에 대한 사유라는 가장 높은 곳에서 우리의 실제 삶이라는 가장 구체적인 땅으로 내려올 준비가 되었다. 이 여정이야말로 철학의 진정한 목적이니 기꺼이 함께 가자. 우리는 방금 신의 불가해한 위대함 앞에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새로운 질문이 그대들을 괴롭힌다. 그토록 위대하고 철학적인 신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토록 사소하고 번거로워 보이는 수많은 계명들을 주셨는가? 어떤 음식은 먹고 어떤 음식은 피하라, 어떤 옷은 입고 어떤 옷은 입지 마라 하는 그 수많은 규칙들 말이다이것들이 그저 맹목적인 복종을 시험하기 위한 자의적인 명령에 불과한가, 모세 벤 마이몬은 단호히 말한다. 아니다다음 장에서는 그분의 뜻이 담긴 율법우리 영혼과 사회를 위한 합리적인 처방전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마이모니데스가 주장하는 부정의 길, 제미나이

 

율법은 영혼의 처방전이다

창조주의 모든 행위에는 목적이 있듯이 그분이 주신 율법의 모든 조항에도 심오하고 합리적인 목적이 있다. 율법은 우리를 억압하는 족쇄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치유하고 완성시키는 신적인 처방전이다. 처방전은 크게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첫째, 율법은 영혼의 건강을 목표로 한다. 영혼의 가장 큰 병은 어리석음, 즉 거짓된 견해에 빠지는 것이다. 특히 우상을 숭배하고, 신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품는 것이야말로 모든 영적 질병의 근원이다. 따라서 율법의 수많은 계명들은 올바른 견해를 가르치기 위해 존재한다. 신은 오직 한 분이며, 완전하고, 형태가 없는 순수한 지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고, 그릇된 우상숭배의 풍습을 멀리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진리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도록 돕는다. 둘째, 율법은 육체의 건강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육체란 그대 개인의 몸뿐만 아니라, 그대들이 모여 사는 사회라는 더 큰 몸을 의미한다. 아무리 영혼이 건강해도, 사회가 폭력과 부당함으로 가득하다면 개인은 온전히 행복할 수 없다. 따라서 율법의 수많은 계명들은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세우기 위해 존재한다. 살인, 도둑질, 간음을 금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명령들은 사람들 사이의 부당함을 제거하고, 모든 이가 서로 돕고 평화롭게 살도록 하는 사회의 건강을 위한 처방이다.

 

보라. 율법의 모든 계명은 이 두 가지 목적, 즉 영혼의 건강(올바른 신념)과 사회의 건강(정의로운 질서)을 위해 주어진 합리적인 처방이다. 어떤 음식 규정은 위생과 건강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다른 우상숭배 민족과 구별하여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모든 계명은 이처럼 깊은 뜻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노예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과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 위대한 의사이신 창조주의 처방전을 신뢰하고 따르는 지혜로운 환자의 행위다. 이제 우리는 신에 대한 올바른 생각과 그분이 주신 율법의 목적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 율법의 정신을 우리 삶의 태도 속에서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가? 다음 장에서는 극단을 피하고 중용을 걷는 지혜로운 자의 길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마이모니데스의 중용의 길, 제미나이

 

지혜로운 자의 길, 중용을 걸어라

건강한 영혼이란 어떤 상태인가? 그것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완벽한 균형을 이룬 상태다. 의사가 몸을 치료할 때를 생각해보라. 몸이 너무 차가우면 따뜻하게 하고, 너무 뜨거우면 차게 한다. 치료란 언제나 극단을 피하여 중간의 건강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영혼의 성품을 다스리는 것도 이와 똑같다. 든 성품에는 두 가지 나쁜 극단이 있고, 그 사이에 하나의 훌륭한 중간 길이 있다. 나는 균형 잡힌 길을 중용(中庸)의 길이라 부른다. 이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자가 걷는 길이며 율법의 참된 정신이다. 예를 들어보자. 위험 앞에서 용기라는 덕을 보자. 한쪽 극단에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비겁함이 있다. 다른 쪽 극단에는 무모하게 모든 것에 뛰어드는 만용이 있다. 지혜로운 자는 이 둘 사이의 중간 길, 즉 마땅히 두려워할 것은 두려워하고 맞설 것은 맞서는 용기를 택한다.

돈을 쓰는 일에 있어서는 한 푼도 쓰지 않으려는 인색함과 아무렇게나 낭비하는 방탕함이 있다. 그 중간 길이 바로 필요한 곳에 아낌없이 쓰는 관대함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비하하는 비굴함과 자신을 실제보다 크게 생각하는 교만이 있다. 그 중간 길이 바로 자신의 가치를 알되 뽐내지 않는 겸손이다. 분노, 쾌락, 명예 등 인간의 모든 성품이 이와 같다. 언제나 양쪽의 나쁜 극단과 그 사이의 좋은 중간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중용의 길을 걸을 수 있는가? 먼저 그대 자신을 진단하라. 의사가 환자를 살피듯 그대는 어떤 극단으로 더 자주 치우쳐 있는가화를 잘 내는가, 아니면 마땅히 화내야 할 때도 참기만 하는가? 만약 그대가 한쪽 극단에 있다면, 의사가 치료하듯 의식적으로 반대쪽 극단을 향해 행동하라. 인색한 사람은 일부러 기부하고 나누는 훈련을 해야 하고, 비겁한 사람은 의도적으로 작은 도전을 감수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렇게 반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마침내 그대는 중간의 균형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중용의 길이야말로 율법의 정신을 삶으로 살아내는 방식이며, 건강한 영혼을 가진 지혜로운 자의 모습이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생에 걸친 꾸준한 훈련이자 자기 성찰의 과정이다. 하지만 모든 윤리적인 노력과 덕의 실천, 그 최종 목적은 무엇인가? 그저 균형 잡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서 그치는가? 아니다. 다음 장, 나의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이 모든 노력이 향하는 단 하나의 정점, 즉 지성을 통한 신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며 긴 안내를 마치겠다.

 

가장 위대한 경배, 지성을 통한 신의 사랑

우리는 이제 긴 안내의 마지막 문 앞에 섰다. 우리는 왜 경전의 비밀을 탐구해야 하는가? 왜 신에 대해 부정의 길을 걸어야 하며, 왜 율법을 지키고 중용의 덕을 실천해야 하는가? 이 모든 길은 단 하나의 목적지에서 만난다. 그것은 바로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다.

내가 말하는 사랑 그저 감정의 뜨거움이나 맹목적인 헌신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정확하게 아는 만큼만 사랑할 수 있다. 그대들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될 때를 생각해보라. 처음에는 그저 외모에 끌릴지 모르지만, 깊은 사랑은 그 사람의 성품, 생각, 가치관을 알아갈수록 깊어지지 않는가? 상대에 대한 앎이 깊어질수록 사랑 또한 깊어지는 법이다. 하물며 창조주에 대한 사랑은 어떻겠는가? 그분에 대한 앎이 없이는 그분을 진실로 사랑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알 수 있는가?

바로 우리가 이제껏 탐험한 두 가지 길을 통해서다. 첫째는, 그분이 만드신 이 세계, 즉 자연의 질서와 법칙을 이성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별들의 운행, 생명의 신비, ()의 원리를 연구하는 것은,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연구하여 그 예술가의 지혜와 솜씨에 감탄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자연을 깊이 알수록  그것을 만드신 분의 위대함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둘째는, 그분이 우리에게 직접 드러내신 뜻, 즉 토라의 율법과 그 깊은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직접 해설해주는 것을 듣는 것과 같다. 우리는 율법의 합리적인 목적을 깨달을수록,  우리를 향한 그분의 자비로운 의도를 알게 된다. 이 두 가지 앎이 깊어질수록 신의 위대함과 지혜와 자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더욱 명확해진다. 그리고 이 명확한 앎에서 다른 어떤 세상의 쾌락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순수하고 강렬한 기쁨과 사랑이 솟아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 지성을 통한 신의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신을 끊임없이 사유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인간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삶이며, 다가올 세상에서 누릴 영원한 행복의 서막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형태의 경배다.

 

나의 안내는 이제 끝났다. 나는 그대들이 딛고 선 이성의 땅과 그대들이 바라봐야 할 신앙의 하늘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으려 했다. 방황하는 그대들이여 그대의 이성을 버리지 마라. 오히려 그 이성을 끝까지 사용하여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한 분을 향해 나아가라. 그분의 창조 세계를 탐구하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라. 그 앎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이야말로 그대 영혼의 모든 갈증을 채워줄 유일한 샘물이다. 이것이 나, 모세 벤 마이몬이 방황하는 모든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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