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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대상과 삶(1)

by 행복 리부트 2025. 11. 1.

"행복은 신 안에서 완성되며, 이성은 신에게 가는 길을 밝힌다." 이 말은 중세 시대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핵심 사상입니다. 오늘은 신앙의 시대에 이성이라는 빛을 밝힌 거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삶과 철학을 말씀드릴께요.

토마스 아퀴나스, 제미나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활동하던 13세기 중반, 세계는 각기 다른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한반도는 고려 후기로 몽골이 침입하여, 왕은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며, 이후 원나라와의  부마국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중국은 남송 말기에서 원나라 초기에 해당하며,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건국하고 남송을 정복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 시대로, 무사 정권이 정치를 주도하였으며, 원나라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유럽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로서 교황권과 왕권이 경쟁하였고,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독교 신학과 융합하며 학문적 업적을 남겼던 시기입니다.

 

지적 폭발, 아리스토텔레스의 등장

토마스 아퀴나스는 13세기 유럽에 살았습니다. 이 시기는 흔히 중세의 절정기라고 불립니다. 지적인 에너지가 폭발하던 놀라운 시대였습니다. 당시 유럽은 십자군 전쟁을 겪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은 이슬람 및 비잔틴 세계와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이때 수백 년간 잊혔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거대한 충격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유럽 사상은 플라톤 철학에 바탕을 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달랐습니다. 그는 현실 세계를 매우 체계적이고 이성적으로 탐구했습니다. 유럽인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철학은 기독교 세계에 위기이자 기회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성주의가 신앙을 위협한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이성의 힘으로 신앙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신앙과 이성은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이것이 13세기 지성계의 가장 뜨거운 질문이었습니다.

스콜라 철학은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핵심적인 사상 체계입니다. 이 이름은 학교(Schola)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주로 중세의 수도원과 초기 대학에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스콜라 철학의 가장 큰 목표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였습니다. 당시 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이성적인 논리로 설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신앙의 진리를 철학적으로 증명하고 체계화하려 노력했습니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스콜라 철학을 세우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당시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유명한 말이 있었습니다. 이성은 신앙을 이해하고 변호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스콜라 철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그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같은 진리를 향한다고 보았습니다. 아퀴나스는 이성적 추론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시도했습니다. 스콜라 철학은 독특한 교육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문답법 또는 변증술이라 불리는 토론 방식입니다. 이 철학은 매우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유를 발전시켰습니다. 중세 시대의 지성을 집대성했으며, 이후 서양 철학과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귀족 가문의 반항아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경 이탈리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요즘 말로 금수저였습니다. 가족들은 그가 가문을 빛내주기를 기대했습니다. 특히 그의 삼촌은 몬테 카시노 수도원의 원장이었습니다. 이곳은 막강한 권력과 재산을 가진 자리였습니다. 가족들은 토마스가 삼촌의 뒤를 잇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토마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5살부터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세속적인 분위기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나폴리 대학에서 새로운 정신을 만났습니다. 바로 탁발 수도회 였습니다. 이 수도회는 당시 새로 생긴 개혁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재산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람들의 자선에 의지해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도시로 직접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아퀴나스는 이들의 모습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19살에 폭탄선언을 합니다. "저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들어가겠습니다."  가족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귀족의 명예를 버리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가족들은 극단적인 방법을 썼습니다. 로마로 가던 아퀴나스를 형제들이 납치했습니다. 그리고 성에 있는 탑에 1년 넘게 가두었습니다. 가족들은 그의 뜻을 꺾으려 온갖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방에 아름다운 여인을 들여보내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타는 장작을 들고 그녀를 쫓아냈습니다. 진리를 향한 그의 의지는 이처럼 굳건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프랑스의 가톨릭 신자

파리의 벙어리 황소

가족의 반대를 이겨낸 아퀴나스는 파리 대학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당대 최고의 스승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만났습니다. 아퀴나스는 몸집이 크고 매우 과묵한 학생이었습니다. 말이 거의 없고 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동료 학생들은 그를 "벙어리 황소"라고 놀려댔습니다. 하지만 스승 알베르투스는 그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스승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저 친구를 벙어리 황소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말하건대, 언젠가 저 황소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될 것입니다." 스승의 예언은 정확했습니다. 아퀴나스는 20대 후반에 파리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적인 철학과 기독교 신앙을 결합하는 위대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강의와 저술 방식은 매우 체계적이었습니다. 이것을 '스콜라적 방법'이라고 부릅니다. 먼저 질문을 던집니다(예: "신은 존재하는가?").  그에 대한 모든 반대 의견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나는 반대로 이렇게 생각한다"며 자신의 견해를 밝힙니다. 성경과 철학적 논증(이성)으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합니다. 마지막으로, 처음에 소개했던 반대 의견들을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반박합니다. 이 방식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었습니다. 그는 "신앙과 이성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성은 신앙으로 가는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평생 엄청난 양의 글을 썼습니다. 그중 신학대전은 그의 모든 사상을 집대성한 대작입니다. 이 책은 신, 인간, 윤리, 법 등 세상의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상의 대성당이라고 불릴 만합니다.

 

마지막 깨달음, 그리고 침묵

아퀴나스는 평생 이성으로 신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갑작스러운 침묵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1273년, 그는 미사를 드리던 중 깊은 신비 체험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 이후, 그는 글쓰기를 완전히 멈추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며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쓴 모든 것들이 지푸라기처럼 하찮게 느껴질 뿐이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몇 달 뒤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두 날개로 진리에 도달하려 했던 위대한 철학자였습니다. 그의 철학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통찰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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