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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쇼펜하우어 철학에 담긴 행복(3)

by 행복 리부트 2026. 3. 22.

우리는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에서 끔찍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우주는 맹목적인 생존 욕망이 서로를 잡아먹는 도축장이며,  인생은 결핍의 고통과 만족에서 오는 권태 사이를 영원히 오가는 시계추라는 내용이었죠. 가슴이 턱 막힙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평생 고통만 받다가 죽어야 하는 존재일까요?

놀랍게도 쇼펜하우어의 대답은 노(NO)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우울했던 철학자는 역설적이게 인간이 이처럼 무시무시한 욕망의 쳇바퀴에서 탈출하여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비상구를 세 군데나 만들어 놓았습니다. 참혹한 절망 끝에서 피어나는 구원의 손길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내용들이 만만치 않습니다.

첫 번째 비상구, 예술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첫 번째 탈출구는 예술입니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음악입니다. 웅장한 교향곡을 듣거나, 숨이 멎을 듯한 아름다운 풍경화를 감상할 때를 상기해 봅시다. 어느 찰나의 순간은 모든 것을 잊게 만듭니다. 내일 갚아야 할 대출금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닙니다. 예술 작품에 몰입하여 자신마저 잊어버리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바로 이러한 순간을 욕망(의지)의 스위치가 일시적으로 꺼진 상태라고 보았습니다. 예술에 깊이 빠져들 때, 인간은 충동적 욕구같은 짐승의 의지에서  잠시 벗어납니다. 세상을 관조하는 맑고 순수한 마음만 남습니다. 고통과 권태의 시계추가 멈춰버리는 마법 같은 기적의 순간입니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그림이나 조각이 세상을 흉내 낸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음악은 세상의 본질인 의지 자체의 직접적인 목소리라고 극찬했습니다.

하지만 예술을 통한 구원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교향곡이 끝나고 미술관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다시 치열한 생존 경쟁과 욕망이 들끓는 시궁창 같은 현실로 돌아 온다는 것입니다. 예술은 당장의 욕망을 잠재울 수는 있지만 치료제는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비상구, 연민

그렇다면 매일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인 구원은 없을까요?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두번째 비상구는 연민(Mitleid, 동정심)입니다. 칸트는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이성이 명령하는 의무인 정언명령을 따르라고 일갈했습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 말에 코웃음을 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진짜 도덕은 이성이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고통받는 타인을 보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오는 눈물(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고대 인도의 지혜인 우파니샤드에서 위대한 진리의 주문을 가져옵니다.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 번역하면 네가 곧 그것(우주)이다 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눈(안경)으로 보면 나와 너는 철저히 분리된 남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을 짓밟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합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베일 너머의 진짜 세상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우주의 본질인 거대한 하나의 의지의 관점에서 보면, 길가에 피어난 꽃도, 짖어대는 개도, 내 돈을 떼먹은 원수도, 그리고 나 자신도 모두 하나로 연결된 똑같은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네가 곧 우주(타트 트밤 아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때리는 것은 결국 내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생생하게 느끼게 됩니다. 길거리에 굶주린 아이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기꺼이 내 빵을 나누어주는 마음,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연민이야말로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을 깨트리고, 우리를 짐승에서 성인(聖人)으로 끌어올리는 진짜 도덕의 출발점이라고 믿었습니다.

여기에서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 가운데 우주의 본질인 거대한 하나의 의지를 알아 보고 넘어 가겠습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Will)는 모든 존재를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 힘입니다. 인간의 욕망, 동물의 본능, 식물의 생장, 자연의 운동, 심지어 무기물의 물리적 힘까지,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단일한 생명력입니다. 즉, 의지는 우주 전체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이자 근원적 충동을 말하는 것이죠.

우리는 각자 독립된 존재처럼 보이지만,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는 모두 같은 하나의 의지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은 욕망하는 의지의 한 형태, 동물은 생존하려는 의지의 한 형태, 자연은 작용하려는 의지의 한 형태

즉, 각각의 개체는 의지의 그림자일 뿐이고 실체는 하나의 거대한 의지입니다.

여기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살짝만 들여다 보죠. 칸트는 우리가 보는 세상을 현상과 물자체로 나누었습니다. 현상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만질 수 있는 우리 마음의 안경(청색 안경)을 통해 걸러진 세상입니다. 반면 물자체는 그 안경을 벗었을 때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진짜 세상을 말하죠. 칸트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결코 물자체를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물자체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선언하죠. 그는 물자체가 바로 의지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거대한 하나의 의지는 마치 바다와 같습니다. 우리는 각자 파도처럼 보이죠.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움직임도 다릅니다. 어떤 파도는 잔잔하고, 어떤 파도는 거칠고, 어떤 파도는 금방 사라지기도 해요. 하지만 파도는 결국 바다라는 하나의 물결에서 태어나고 바다로 돌아갑니다.

 

쇼펜하우어에게 인간도, 동물도, 자연도 모두 하나의 바다(의지)가 만들어낸 수많은 파도(개체)일 뿐입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겉모습만 보고 있기 때문이고, 그 이면에는 하나의 거대한 힘이 모든 존재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죠.

세번째 미소, 성자의 삶

쇼펜하우어의 서재에는 독특한 장식품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가장 존경한 스승 칸트의 흉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금빛으로 빛나는부처인 티베트 불상이였습니다. 서양의 최신 철학과 동양의 불교 사상이 그의 방 안에서 매일 마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쇼펜하우어가 찾아낸 세 번째이자 궁극적인 탈출구, 즉 금욕과 해탈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고통을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인을 제거하면 됩니다. 고통의 원인은 맹목적인 의지이자 욕망입니다. 그렇다면 의지 자체를 없애면 됩니다. 살고 싶어 하는 욕망, 쾌락을 좇는 본능을 철저히 부정하고 스스로를 비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涅槃, Nirvana)이자 해탈(解脫, Liberation) 입니다. 

열반은 욕망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조차 사라진 완전한 평정(寂靜,적정) 상태입니다.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보면 의지가 완전히 소멸된 상태에 해당하는 것이죠. 해탈은 욕망·집착·번뇌라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과정  즉, 인간을 얽매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풀려나는 상태입니다. 쇼펜하우어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의지의 부정과 거의 동일한 개념이죠. 해탈이 속박을 끊는 행위라면, 열반은 속박이 완전히 사라진 뒤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술과 윤리를 통해 욕망의 덧없음을 깊이 깨달은 인간은 마침내 모든 고통의 근원인 의지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더 이상 바라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없는 절대적인 평온(Nirvana)의 상태가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궁극적이고 영원한 비상구입니다. 

해탈과 열반의 상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집착, 자아마저 내려놓고 완전한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성자(聖者)들이야말로, 끔찍한 맹인 거인(의지)의 목줄을 끊어버리고 진정한 평화를 얻은 우주의 승리자라고 찬양했습니다. 그는 평생 불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심오하고 진실한 종교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쾌락이 아닌 고통의 결핍

하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당장 짐을 싸서 산속으로 들어가 깨달음을 얻고 성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쇼펜하우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년에 발표한 에세이집 <소품, 부록, 1851>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아주 현실적이고 뼈 때리는 실용적 행복론을 남겼습니다.

그의 행복론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쾌락을 좇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피하는 데 있다." 보통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돈, 명예, 음식, 화려한 파티 등 적극적으로 쾌락(플러스)을 쫓아다닙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쾌락은 신기루입니다. 얻는 순간 권태로 변해버리니까요.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쾌락을 좇지 않습니다. 대신 내 삶에서 질병, 빚, 다툼 같은 고통(마이너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갑니다.

쇼펜하우어 행복의 결론은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언가를 얻어서 기쁜 상태와는 다릅니다. 그의 행복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행복이란 고통이 사라진 순간의 부정적(negative) 만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바라 본 인간의 삶은 의지(will)에 의해 끊임없이 욕망하고 갈망하는 과정입니다.욕망은 충족되기 전에는 고통, 충족된 후에는 곧바로 지루함인 권태를 낳기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지속적인 행복은 가질 수 없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행복은 고통이 잠시 멈춘 상태, 즉 결핍이 해소되어 생기는 일시적 평온에 불과한 것입니다. 욕망을 줄이고, 의지의 소란을 잠재울 때 비로소 인간은 잠깐이나마 평온을 맛볼 수 있다고 본 것이죠. 지독한 회의론자이며 염세주의 철학자, 고독을 즐긴 그의 관점은 행복에는 다소 비관적이지만, 동시에 욕망을 절제하고 마음의 평온을 추구하는 동양의 행복론과는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다음은 쇼펜하우어가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행복메시지입니다.

 

바로 가기:고독한 비관주의자 쇼펜하우어의 삶(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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