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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고독을 즐긴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2)

by 행복 리부트 2026. 3. 22.

쇼펜하우어의 기념비적인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818>를 펼치면,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강렬한 첫 문장이 등장합니다. '세계는 나의 표상(表象, Vorstellung)이다.' 여기에서 표상이란 무엇일까요? 표상은 내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을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산책했던 칸트의 파란색 안경 비유를 기억하십니까?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철학을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칸트의 안경을 차용하여 자신의 철학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매일 보고, 듣고, 만지는 세상은 진짜 세상이 아닙니다. 내 눈과 귀, 그리고 뇌라는 안경을 거쳐서 만들어진 가상 현실(VR)에 불과합니다. 내가 눈을 감고 죽어버리면 내가 보던 이 우주도 담배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죠.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기막힌 진리를 고대 인도의 철학인 우파니샤드에서 찾아냅니다.

힌두교에서는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 세계를 마야(Maya)의 베일이라고 부릅니다. 마야는 환영이나 속임수를 뜻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는 진실을 가린 얇은 베일인 마야에 덮인 채, 신기루 같은 세상, 즉 표상을 진짜라고 믿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불쌍한 죄수들입니다. 서양의 철학과 동양의 수천 년 된 지혜가 쇼펜하우어의 머릿속에서 만난 찌릿한 순간이었습니다.

철학계의 적통 논쟁

세상이 내 머릿속의 홀로그램(표상)이라는 것까지는 동의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머릿속 안경을 훌렁 벗어 던졌을 때, 베일 너머에 있는 진짜 세상의 본모습, 칸트가 말한 물자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칸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안경을 벗을 수 없다. 그러니 진짜 세상(물자체)이 무엇인지는 인간의 머리로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당대 독일 철학계에 심각한 내전이 벌어집니다. 칸트 이후 등장한 피히테, 셸링, 그리고 철학계의 황제 헤겔은 칸트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습니다. 특히 헤겔은 칸트에 맞서서 당당하게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진짜 세상을 알 수 있다. 우주의 본질은 곧 위대한 절대 정신(이성)이며, 역사는 이성이 발전해 나가는 합리적인 과정이다. 헤겔의 유명한 명언,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현실은 위대한 이성이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반항아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이 말을 듣고 분노로 치를 떨었습니다. "아니,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라! 전쟁으로 수백만이 죽어 나가고, 가난한 자들이 굶어 죽고,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끔찍한 지옥탕이 도대체 어디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란 말인가? 헤겔, 저 사기꾼은 지금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기 위해 알맹이 없는 헛소리로 현실의 권력을 찬양하고 있을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만이 위대한 칸트의 유일한 진짜 후계자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헤겔을 비롯한 주류 철학자들을 철학을 타락시킨 3대 궤변가라 부르며 저주했습니다. 헤겔이 세상을 아름답고 논리적인 이성의 왕국으로 포장할 때, 쇼펜하우어는 베일 뒤에 숨겨진 세상의 끔찍한 맨얼굴을 직시 하였습니다.

 

여기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3대 괘변가는 헤겔, 피히테, 셸링이었습니다. 그는 헤겔을 난해한 언어로 허무맹랑한 체계를 만든 철학의 타락자로, 피히테를 공허한 자아 철학을 늘어놓는 말장난꾼으로, 셸링을 자연철학을 신비주의로 흐린 사기꾼에 가깝다고 공격하였습니다.

이성은 맹인 거인을 탄 앉은뱅이

쇼펜하우어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웃기지 마! 칸트가 영원히 모를 거라고 했던 진짜 세상인 물자체의 정체를 나는 알아냈다." 그는 밖을 관찰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았습니다. 내 몸도 세상의 일부니까요. 내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성이나 논리 따위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펄떡거리는 짐승 같은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배가 고프면 무언가를 미친 듯이 뜯어먹고 싶고, 이성을 보면 맹렬하게 번식하고 싶어 하는 끈적하고 맹목적인 생명력을 본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유레카를 외칩니다. "찾았다! 이 세상의 진짜 본모습, 이 우주를 멱살 잡고 끌고 가는 소름 끼치는 괴물의 이름은 합리적인 이성 따위가 아니다. 바로 맹목적인 의지(Will)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의지는,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같은, 아름다운 자유 의지가 아닙니다. 살고자 하는 생존 의지, 자식을 남기고자 하는 생식 의지, 무지막지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맹목적인 충동입니다. 그가 보기에 자연계는 생존 의지가 서로를 물어뜯고 잡아먹는 사각의 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보기에 세상은 아름다운 신의 창조물이 아닙니다. 맹목적 의지가 살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고 잡아먹는 우주적 스케일의 호러쇼,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무대였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생물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자연계의 잔혹함을 증거로 들이밉니다. 호주에 사는 거대한 불독개미를 반으로 잘라보라. 그러면 머리 부분은 자기의 꼬리 부분을 이빨로 미친 듯이 물어뜯고, 꼬리 부분의 독침은 자기의 머리를 향해 마구 찌른다. 결국 자기가 자기를 죽일 때까지 싸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지배하는 의지의 끔찍한 맨얼굴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일갈합니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죠. 고귀하고 점잖은 척하지만 결국 굶기면 남의 빵을 훔치고 짐승처럼 돌변합니다. 여기서 서양 철학사를 발칵 뒤집어 놓은 쇼펜하우어의 위대한 비유가 등장합니다. 당시 헤겔을 비롯한 주류 철학자들은 이성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성을 하찮은 비서로 전락시킵니다.

쇼펜하우어의 위대한 비유는 이성(지성)은 건장한 맹인 거인(의지)의 어깨 위에 올라탄, 눈은 밝지만 다리를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일 뿐이다 입니다. 헤겔은 앉은뱅이인 이성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었지만,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진짜 힘이 센 쪽은 맹인 거인인 인간의 의지입니다.

거인이 자신의 욕망대로 쿵쿵 걸어가면, 어깨에 올라탄 앉은뱅이 이성은 눈을 굴리며 "그래, 이 길로 가는 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야"라고 비겁하게 변명을 만들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질 때 논리적으로 따져서 사랑합니까? 아닙니다. 번식이라는 강력한 의지가 우리를 덮치고 나면, 이성은 나중에 저 사람은 성격이 좋아서 끌렸어라고 그럴싸한 합리화를 할 뿐입니다.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쇼펜하우어입니다.

니체와 프로이트가 경악하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저 맹목적인 욕망에 질질 끌려다니는 짐승에 불과하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쇼펜하우어의 선언은 당대 유럽인들의 자존심을 박살 냈습니다. 하지만 훗날에 이 글을 읽은 젊은 천재들은 전율했습니다. 심리학의 아버지 프로이트는 쇼펜하우어를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프로이트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인간의 숨겨진 욕망, 즉 무의식과 이드(Id)라는 개념이 이미 수십 년 전 쇼펜하우어의 책에 서술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이 탄생하기도 전에, 철학자가 먼저 인간 내면의 지하실을 샅샅이 탐색한 것입니다.

망치를 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역시 맹목적인 의지에 매료되었습니다. 다만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를 뒤집어, 그 의지를 삶을 긍정하는 폭발적인 에너지, 이른바 권력에의 의지로 탈바꿈시킵니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모두 당시 철학계의 주류였던 헤겔이 아닌, 깐깐한 아웃사이더 쇼펜하우어의 우울한 책에서 지혜의 배우고 자란 셈입니다.

고통과 권태를 오가는 시계추, 인생이라는 비극

그렇다면 이런 지독한 괴물(의지)에게 조종당하는 인간의 삶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요?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한 문장으로 잔인하게 요약합니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참으로 뼈를 때리는 통찰이지 않습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합니다. 새 자동차를 원하고, 승진을 원하고, 멋진 연인을 원합니다.

욕망을 원한다는 것은 나에게 그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결핍이지요. 결핍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깁니다. 그래서 뼈 빠지게 고생해서 마침내 원하는 자동차를 샀습니다. 욕망이 채워졌습니다. 고통이 사라졌으니 이제 행복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차를 산 기쁨은 길어야 한 달입니다. 욕망이 채워진 빈자리에는 또 다른 악당이 스멀스멀 기어들어 옵니다.

바로 권태라는 지루함입니다. 흥미가 떨어지고 인생이 허무해집니다. 권태라는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는 또다시 더 비싼 차, 더 큰 아파트라는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냅니다. 새로운 욕망이 곧 새로운 고통입니다. 결국 인생은 무언가를 원해서 오는 고통과, 그것을 얻고 나서 허무해지는 권태 사이를 영원히 왔다 갔다 하는시계추라는 것입니다.

칸트와 헤겔, 그리고 쇼펜하우어

칸트는  우리가 보는 세상은 어디까지나 현상, 즉 파란 안경을 쓰고 보는 세상이라고 말했죠. 파란 안경을 벗었을 때 보이는 원래의 모습인 물자체는 결코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끝까지 파란 안경을 벗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틀을 이어받아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그는 우리가 알 수 없다고 여겨졌던 물자체의 정체가 사실은 맹목적으로 욕망하고 충돌하는 의지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갈망하고 고통받는 이유도 맹목적인 의지가 우리를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반면 헤겔은 세계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세계가 혼란스럽고 우연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러한 모습 자체가 이성이 스스로를 진보해 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역사도, 사회도, 인간의 정신도 모두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이성이 발전적으로 나아가는 흐름 속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런 헤겔의 낙관적 체계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세계는 이성의 질서가 아니라 비이성적 의지가 만들어내는 끝없는 욕망의 소용돌이로 본 것입니다.

결국 세 철학자의 차이는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칸트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밝혔고, 헤겔은 이성의 체계를 세웠으며, 쇼펜하우어는 그 이면에 흐르는 인간 욕동의 의지를 밝혀 냈다. 다음 편은 쇼펜하우어 철학에 담긴 행복을 말씀드립니다. 부정적 회의주의자이며 고독한 철학자는 행복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바로 가기:고독한 비관주의자 쇼펜하우어의 삶(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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