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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고독한 비관주의자, 쇼펜하우어의 삶(1)

by 행복 리부트 2026. 3. 21.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반,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과 프랑스 대혁명의 피바람이 휩쓸고 간 격동기였습니다. 시대의 공기는 묘했습니다. 한편에서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인간의 위대한 이성과 과학이 결국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 것이라는 계몽주의적 낙관론이 팽배했습니다. 낙관론의 정점에는 역사는 이성의 발전 과정이라고 외치던 철학계의 황제, 헤겔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비단 유럽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동아시아 역시 폭풍의 전야였습니다. 중국의 청나라는 백련교도의 난과 아편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고, 조선은 정조 사후 세도 정치가 득세하며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습니다. 일본은 에도 막부의 폐쇄성 속에서 서서히 곪아가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낡은 시대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요동치며 온갖 고통이 분출하던 시기입니다. 모두가 위대한 이성과 진보를 찬양할 때, 홀로 세상의 어둠과 인간의 고통을 직시한 괴짜가 있었습니다. 바로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 1860)입니다.

 아버지 죽음의 트라우마

1788년, 프로이센 왕국의 부유한 자유 도시 단치히(현재 폴란드의 그단스크)에서 쇼펜하우어는 돈이 많은 거상(巨商)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영국의 신사처럼 세련된 국제적인 상인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영국, 프랑스, 독일 어디서나 똑같이 발음되는 아르투르(Arthur)라고 지었습니다.

소년 쇼펜하우어는 부모님과 함께 유럽 전역을 여행하였습니다. 하지만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여행은 오히려 소년의 마음에 비관주의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프랑스 툴롱 항구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채찍질을 당하며 노를 젓는 갤리선 노예들을 목격한 것입니다. 화려한 유럽의 이면에 숨겨진 처참한 고통과 가난, 질병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소년은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은 결코 신이 만든 아름다운 놀이터가 아니다. 지옥이란 것을요.

더욱 끔찍한 비극은 가족 안에서 터졌습니다. 쇼펜하우어가 17세 되던 해, 우울증을 앓던 아버지가 창고 수로에 빠져 사망한 것입니다. 경찰은 실족사로 처리했지만,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자살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아버지의 끔찍한 죽음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트라우마가 되었고, 세상의 근본을 고통으로 바라보는 철학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와의 전쟁,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천재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 요한나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평소 남편의 억압적인 태도에 지쳐 있었습니다. 막대한 유산을 챙긴 어머니는 문화의 중심지 바이마르로 이사하여 매일 밤 화려한 파티를 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문호인 괴테도 그녀의 단골 손님이었습니다. 어머니 요한나는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되어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했습니다.

하지만 우울하고 냉소적인 아들 쇼펜하우어의 눈에 어머니의 삶은 천박하고 가식적인 쾌락 추구에 불과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매일같이 어머니의 파티를 비꼬았고, 어머니는 칙칙하고 거만한 아들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의 파티에 참석한 위대한 문호 괴테가 젊은 쇼펜하우어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요한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아들은 장차 아주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오."

보통의 어머니라면 기뻐했겠지만,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요한나는 분노하며 말했습니다. 한 집안에 두 명의 천재가 있을 수는 없다! 두 사람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날 격렬한 말다툼 끝에 화가 난 어머니는 아들을 계단 밑으로 밀어 버렸습니다. 먼지를 털고 일어난 쇼펜하우어는 차갑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훗날 내 이름 덕분에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이날 이후,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와 인연을 끊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24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지독한 애증과 배신감은 훗날 그가 극단적인 여성 혐오증을 갖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철학계의 대참사, 황제 헤겔에게 도전장을 내밀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평생 돈을 벌 필요가 없었던 쇼펜하우어는 가업을 팽개치고 베를린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인문학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30세가 되던 1818년, 자신의 모든 사상을 쏟아부은 필생의 역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를 출간합니다. 그는 이 책이 세상을 뒤집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당당하게 책을 괴테에게 보냈고 세상의 찬사를 기다렸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역대급 폭망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우울하고 기괴한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출판된 책의 절반 이상이 팔리지 않아 휴지 조각으로 팔려나가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자존심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1820년, 그는 베를린 대학에 강사 자리를 얻습니다. 당시 베를린 대학의 최고 스타는 단연 헤겔이었습니다. 헤겔의 강의실은 수백 명의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질투심과 오만함에 불타오른 쇼펜하우어는 철학 역사상 가장 무모하고 코미디 같은 도발을 감행합니다. 자신의 강의 시간을 헤겔의 강의와 완벽하게 똑같은 요일, 똑같은 시간으로 정해버린 것입니다. 학생들이 헤겔의 가짜 철학과 나의 진짜 철학 중 무엇을 선택하는지 보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헤겔의 강의실에는 300명이 몰려가 환호했지만, 쇼펜하우어의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생은 고작 3~4명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며칠 뒤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쇼펜하우어는 강의를 때려치웠습니다. 그리고 평생 동안 헤겔을 향해 권력에 아부하는 엉터리 사기꾼, 돌대가리, 진리 파괴자라는 입에 담지 못할 독설을 퍼부으며 저주했습니다. 1831년, 베를린에 끔찍한 콜레라가 돌았습니다. 당시 베를린 대학 총장이었던 헤겔은 철학자는 도망치지 않는다며 베를린에 남았다가 콜레라에 걸려 며칠 만에 사망합니다. 반면, 겁이 많고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쇼펜하우어는 콜레라 소식을 듣자마자 짐을 싸서 뒤도 안 돌아보고 베를린을 탈출해 프랑크푸르트로 피했고, 목숨을 건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남은 것은 낙관주의자가 아닌, 지독한 비관주의자였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외로운 은둔자, 푸들과 플루트

쇼펜하우어는 대학 교수로서의 실패, 저서의 흥행 참패로 세상이 자신의 천재성을 몰라본다며 학계와 완전히 담을 쌓았습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하여 죽을 때까지 홀로 은둔의 철학자로 살았습니다. 그의 일상은 칸트 뺨치게 규칙적이고 기괴했습니다. 지독한 인간 혐오증 환자였던 그는 사람을 믿지 않았습니다. 평생 털이 북슬북슬한 푸들 반려견만을 키웠습니다. 개의 이름은 늘 힌두교에서 우주의 영혼을 뜻하는 아트만(Atma)이었습니다. 산책할 때 개가 말을 안 들으면 "이런 사람 같은 놈!"이라고 욕을 했습니다. 그에게 사람 같다는 말은 최악의 욕설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냉수마찰을 하고 직접 커피를 끓여 마신 뒤 책을 읽고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매일 플루트를 연주했습니다. 오후가 되면 영국식 식당에 가서 지정된 자리에 앉아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식탁 위에는 항상 금화 한 닢을 올려두었습니다. 웨이터가 이유를 묻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만약 저기 떠드는 영국인 장교들이 말이나 여자 이야기 대신, 단 한 번이라도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눈다면 이 금화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할 것이오. 물론 그는 평생 금화를 기부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의심과 피해망상도 심했습니다. 이발사가 면도날로 자신의 목을 그을까 봐 절대 남에게 면도를 맡기지 않았습니다. 잘 때는 항상 머리맡에 장전된 권총과 단검을 두고 잤고, 도둑을 피하기 위해 재산 장부는 아무도 모르는 고대 라틴어나 그리스어로 비밀스럽게 적어두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혐오하고 두려워했던 고독한 노인이었습니다.

60대에 찾아온 기적 같은 신드롬

인생의 황혼기에 세상에서 완벽하게 잊힌 줄 알았던 괴짜 노인에게 엄청난 기적이 찾아옵니다. 1851년, 그의 나이 63세에 출간한 에세이집 <소품과 부록>이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린 것입니다. 이 책은 어렵고 딱딱한 철학서가 아니고 쇼펜하우어가 평생 겪은 썰과 독설, 그리고 인생에 대한 실용적인 조언(행복론, 독서론, 여성론 등)을 아주 세련되고 매끄러운 문장으로 풀어낸 수필집이었습니다.

혁명의 실패와 사회적 혼란에 지쳐 헤겔의 이성과 진보에 환멸을 느끼던 유럽의 젊은이들은 세상의 고통과 허무를 직설적으로 찔러주는 쇼펜하우어의 쿨한 독설에 열광했습니다. 바야흐로 유럽 전역에 쇼펜하우어 신드롬이 일어났습니다. 대학 강단에서 쫓겨났던 그가 하루아침에 유럽에서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철학자로 등극한 것입니다.

비관주의 철학자라면 세속적인 인기를 경멸했을 것 같지만, 쇼펜하우어는 아주 솔직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뒤늦게 찾아온 인기를 미친 듯이 즐겼습니다. 신문과 잡지에 자신의 이름이 실리면 스크랩을 해서 매일 읽었고, 집으로 찾아오는 수 많은 팬과 추종자들을 기쁘게 맞이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내 철학은 밤하늘의 달과 같다. 해(헤겔)가 지고 나니 이제야 내가 빛나는구나!"

그렇게 유럽 최고의 스타로 달콤한 여생을 보내던 1860년 9월 21일 아침, 72세의 쇼펜하우어는 늘 그렇듯 가정부가 차려준 아침 식사를 하고 편안하게 소파에 기대앉았습니다. 잠시 후 가정부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아주 평온한 얼굴로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고통을 그토록 증오했던 철학자에게 걸맞은, 일말의 고통도 없는 완벽하게 고요한 죽음이었습니다.

니체, 바그너, 프로이트를 낳은 위대한 아버지

당대에는 주류 학계에서 철저히 왕따를 당했지만, 쇼펜하우어가 후대 지성사에 미친 영향은 헤겔을 쉽게 뛰어넘습니다. 음악의 거장 바그너는 그의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아 자신의 오페라를 완전히 뜯어고쳤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니체는 헌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책을 발견하고 내 영혼을 사로잡은 유일한 스승이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무의식의 세계를 최초로 탐구한 선구자였습니다. 인간이 이성이 아니라 맹목적인 욕망에 의해 끌려다니는 존재라는 그의 통찰은, 훗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뿌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동양의 불교 사상을 서양 철학과 융합시킨 최초의 철학자로서 톨스토이, 프루스트, 아인슈타인 등 수많은 현대의 천재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성에 대한 맹신이 무너진 현대에 트라우마와 상실에 시달리는 오늘날의 심리학과 예술치료 분야에서, 고통을 직시하고 승화시키려 했던 쇼펜하우어는 치유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의 글은 오늘 날의 사람들에게도 힘든 마음에 위안을 주는 진통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다음 글은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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