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9일. 서울 연남동의 한 집에서 57세의 여인이 눈을 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단 한 마디였습니다. "엄마."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녀는 영문학 교수였습니다. 소아마비 1급 장애인이었습니다. 세 번 암과 싸운 투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녀 스스로는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삶은 천형(天刑)이 아니라 천혜(天惠)의 삶입니다." 그 분의 이름은 장영희(張英姬, 1952~2009)입니다.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이자 수필가였습니다. 이 땅에서 57년을 살다 간 그녀가 전한 행복의 메시지는 지금도 수많은 독자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쉽니다.


목발 짚은 소녀의 꿈
그녀는 1952년 9월에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한국 영문학계의 거목이신 고(故) 장왕록 서울대 교수입니다. 어머니는 강철 같은 심지를 가진 이길자 여사이며, 장 교수는 다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그 녀는 첫 돌이 지나기 무섭게 고열이 찾아왔습니다. 척추성 소아마비였습니다.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녀의 걷는 법은 달라졌습니다. 목발을 짚었습니다. 어머니의 헌신은 눈물겨웠습니다.초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매일 아침 딸을 등에 업고 학교까지 걸어갔습니다. 비 오는 날도, 눈 오는 날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두 시간마다 화장실을 데려다주기 위해 수업 중에 학교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딸의 손을 잡고 종로의 침술원에 다녔습니다.

그녀는 훗날 어머니를 이렇게 썼습니다. "장애인이 죄인이었던 세상에서, 딸이 발붙이고 살아갈 땅을 마련해주기 위해 투쟁의 전사로 사셨다." 아버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1960~70년대, 장애인은 학교에 시험조차 볼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데리고 학교를 하나하나 직접 찾아다녔습니다. 사정하고, 설득하고, 때로는 싸웠습니다. 그 끝에 딸은 시험을 볼 수 있었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장 교수는 마침내 아버지의 모교인 서강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아버지가 걷던 그 길로 딸이 목발을 짚고 올라섰습니다.

강의실이 가장 행복한 곳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85년 부터는 모교 서강대에서 강단에 섰습니다. 그녀의 강의는 학생들 사이에서 전설이었습니다. 영문학을 가르쳤지만, 사실은 삶을 가르쳤습니다. 셰익스피어를 읽으면서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헤밍웨이를 통해 용기를 전했습니다. 학생들은 그녀의 강의 시간이 끝나면 영어 실력만이 아니라 뭔가 더 단단해진 자신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문장이었습니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 그녀는 강의실에서도, 칼럼에서도, 그 말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척추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강의 복귀를 준비했습니다. 항암 치료로 몸이 녹아내리는 와중에도 컴퓨터 앞에 앉아 원고를 썼습니다.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후에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강의 수를 줄이라고 권유했는데 끝내 듣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강의실은 병원보다 나은 치료제였습니다.

보스턴의 작은 승리
2001년, 그녀는 하버드대학교 방문교수 자격으로 미국 보스턴에 갔습니다. 설레는 안식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살던 아파트 7층짜리 건물의 엘리베이터가 고장났습니다. 보수 기간이 무려 3주였습니다. 두 다리가 불편한 그녀는 3주 동안 매일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습니다.

그녀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보스턴 굴지의 부동산 회사를 상대로 정식으로 항의했습니다. 협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회사로부터 공식 사과와 보상을 받아냈습니다. 이 이야기가 <보스턴 글로브>에 실렸습니다. NBC TV와 지역 방송이 앞다퉈 보도했습니다. 미국의 5,400만 장애인이 환호했습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애인 학생들에게 스스로 일어서라고 가르쳐온 내가 적당히 타협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스턴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해 안식년, 건강검진에서 유방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때 칼럼에 남긴 문장이 있습니다. "신은 인간의 계획을 싫어하시는 모양이다."

세 번의 암, 그래도 오뚝이는 일어났다
첫 번째 암은 유방암이었습니다. 2001년이었죠. 두 번의 수술과 방사선 치료로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암은 척추암이었습니다. 2004년 9월에 발병하였습니다. 완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척추로 전이되었습니다. 확률은 10%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10%가 현실이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암은 간에 발생하였습니다. 암이 간으로 전이 된 것입니다. 2008년의 일입니다. 2001년 부터 무려 세번의 암이 몸도 약한 여성을 향해 확산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세 번 모두,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일어났습니다.

척추암 진단을 받던 날, 연재 중이던 칼럼에 마지막 글을 올렸습니다. 이렇게 끝맺었습니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24차례의 항암 치료를 마치고 다시 강단에 섰을 때, 그녀는 봄날의 꽃처럼 환하게 웃었습니다. 취재하던 기자가 물었습니다. "힘드시지 않으셨어요?" 그녀가 답했습니다. "힘들었죠. 근데 봄이 이렇게 예쁜데, 힘들다고만 할 수 있나요?"

2006년, 두 번째 투병을 이겨낸 뒤 이렇게 썼습니다. "지난 3년 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며 잘 이겨냈다.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명랑삼총사, 우정이 곧 치료제
그녀에게는 특별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해인 수녀와 김점선 화백이었습니다. 세 사람은 스스로를 명랑삼총사 라 불렀습니다. 천주교 수녀와 화가, 그리고 영문학 교수. 얼핏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모두 암 환자였습니다. 세분 다 유머가 넘쳤습니다. 그리고 삶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이해인 수녀는 훗날 회고했습니다. "어느 날 셋이 오랜만에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만나자마자 각자 항암 부작용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으며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다들 암 환자인데도 그 식탁이 얼마나 유쾌했는지 모릅니다." 유방암으로 힘들 때도, 척추암으로 쓰러질 것 같을 때도 그녀는 웃었습니다. 그것이 그녀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행복론, 축복을 세어보라
그녀의 대표 에세이 제목은 이것입니다. <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보라, Count your blessings> 영어 속담에서 가져온 말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천형이라고 불리는 내 삶에도 축복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축복의 이유를 꼽았습니다.

첫째. 나는 인간이다. 어느 날 여섯 살배기 조카와 놀이공원에 갔습니다. 좁은 원을 하루 종일 돌고 또 도는 말들을 보았습니다. 목에는 번개, 바람, 질주 같은 이름표를 달고 말이죠. 초점 없고 슬픈 그들의 눈을 보며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아,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둘째. 내 주위에는 늘 좋은 사람만 있다. 내 주위에는 좋은 부모, 든든한 형제, 따뜻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있어 어떤 고통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셋째. 내겐 내가 사랑하는 일이 있다. 강의실에 서는 것, 문학을 가르치는 것, 글을 쓰는 것, 그런 일이 있었기에 병원 침대에서도 노트북을 꺼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일로 나는 고통을 잠시 있고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넷째. 남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 그녀는 이것을 가장 소중한 축복이라 여겼습니다. "행복은 우리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작은 순간들에 보석처럼 숨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유작, 병상에서 완성한 마지막 선물
2009년 봄, 그녀는 병상에서 원고를 교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책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었습니다.
책 인쇄가 끝난 5월 8일에 그녀는 이미 의식불명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인 5월 9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책의 프롤로그에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적을 원한다. 암에 걸리면 죽을 확률이 더 크고, 확률에 위배되는 것은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사흘에 걸쳐 노트북에 써 내려갔습니다. "엄마 미안해.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살다 나중에 다시 만나."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문장입니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그 마지막 목표도 이루었습니다. 아버지 장왕록 교수의 묘 바로 옆에 안장되었습니다. 생전에 항상 그리워하고, 늘 기억하던 아버지 곁에서 그녀도 편히 잠들었습니다.

기적을 살다 간 사람
장영희 교수가 세상을 떠나던 날, 며칠간 비가 내리다 갑자기 하늘이 맑게 개었다고 합니다. 지인들은 말했습니다. "평소에도 밝고 낙천적이더니, 떠나는 순간에도 그렇게 기억되고 싶었나 봐요." 그녀의 여동생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언니의 인생은 신파극이 아니었습니다. 억척스럽게 극복한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면서 힘든 고비를 넘었습니다."

소아마비에다 세 번의 암, 수십 차례의 항암 치료에도 그녀가 남긴 말들은 하나같이 밝습니다. 따뜻합니다. 그리고 살아있습니다. 왜일까요. 그녀는 어두운 삶을 극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안에서 축복을 찾았습니다. 작은 것에서 기쁨을 발견했습니다. 봄햇살에 감사했습니다. 조카의 웃음에 행복했습니다. 강의실의 학생들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이 행복이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의 작은 것들 안에 있습니다. 그녀는 57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57년은 많은 사람들의 100년보다 환하고 따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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