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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아보하'의 행복

바보의 행복, 김수환 추기경

by 행복 리부트 2026. 3. 2.

 40만 명이 줄을 선 날
2009년 2월, 서울 명동성당 앞에 긴 줄이 생겼습니다. 지하철 명동역에서 성당 입구까지는 300미터입니다. 영하의 날씨에도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3일 동안 조문객 40만 명이 다녀갔습니다. 그날 세상을 떠난 이는 한 명의 신부였습니다. 스스로를 평생 바보라 불렀던 사람, 김수환 추기경(1922~2009) 이었습니다. 그분이 남긴 재산은 300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분의 삶은 지금도 이토록 오래 기억될까요. 이유를 들여다보면 행복이 무엇인지 보입니다.


옹기장수 집 막내아들
1922년 5월, 대구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박해를 피해 전국을 떠도는 옹기장수였습니다. 어머니는 글자를 거의 모르는 분이었지만, 신앙심 하나만은 산처럼 굳건하였습니다. 아이는 5남 3녀 중 막내였습니다.

집이 가난하여 이사를 자주 다녔습니다. 밥을 굶는 날도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해수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훗날 추기경이 된 그분은 이 시절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을 뼈저리게 느꼈을  텐데도 왜 우리 집은 이렇게 가난한가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가난이 불행의 조건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유년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신부가 되기 싫었던 신부
어머니는 어느 날 두 아들을 불러 앉히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커서 신부가 되거라." 형 동한은 흔쾌히 따랐습니다. 하지만 막내는 달랐습니다. 그의 꿈은 장사꾼이었습니다. 스물 다섯에 장가를 가겠다는 계획까지 세워두었던 소년이었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떠밀려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마음은 내내 딴 곳에 있었습니다. 집에 가고 싶어 1전짜리 동전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들키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규칙상 돈을 소지하다 들키면 집으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끝내 모른 척하시자 그 동전을 담장 너머로 던져 버렸습니다.

꾀병을 부린 적도 있었습니다. 머리가 아프다며 기숙사에 누웠다가 심심해서 일어나 신부님께 "축농증에 걸렸습니다" 라고 했더니, 이후에 진짜 축농증이 발생하여 수술까지 받게 되는 황당한 일도 겪었습니다. 신부의 길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성인전을 읽던 어느 날 그분 마음 속에 불이 켜졌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는 삶에 대한 열망이 자랐습니다. 그분은 1951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 안동본당
그분은 경북 안동 본당 주임신부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신자들은 가난했습니다. 끼니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분은 훗날 이렇게 회고하셨습니다. "성직 생활 52년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순박한 교우들과 희노애락을 나눈  본당 신부 시절이었습니다." 끼니도 제대로 못 먹었지만 정이 넘쳤다고 하셨습니다. 함께 울고 웃었다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추기경이 되고 나서도 그 시절을 가장 그리워하셨습니다. 행복은 가진 것의 크기가 아닙니다. 함께하는 사람의 따뜻한 온기였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안동에서 배웠습니다.


전 세계 최연소 추기경
1966년, 42세에 주교가 되셨습니다. 1968년에는 서울대교구장 대주교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1969년, 마침내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되셨습니다. 당시 전 세계 136명의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였습니다. 그분의 나이 47세였습니다. 책임이 무거운 화려한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추기경 생활을 두고 남긴 말은 이랬습니다. "추기경으로서의 삶은 영광이자 동시에 행복한 고난이었습니다." 고난이 시작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어둠 속의 빛, 명동성당의 기억
1970년대, 대한민국은 군사 독재 시대였습니다. 그분은 1971년 성탄대축일 강론에서 처음으로 박정희 정권을 공개 비판하셨습니다. 이듬해 유신이 선포되자 시국 성명을 발표하셨습니다. 민주주의를 외치다 감옥에 간 사람들 편에 서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진면목이 가장 빛난 것은 1987년이었습니다. 6월 항쟁 당시, 경찰에 쫓기던 시위대 수천 명이 명동성당으로 피신했습니다. 정부는 성당으로 진입하여 연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분이 경찰에 전한 말이 지금도 회자됩니다. "경찰이 들어 온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 신부님들, 그 뒤에 수녀님들, 학생들은 수녀님들 뒤에 있습니다. 그들을 체포하려면 나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짓밟고 가십시오." 경찰은 끝내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항상 가장 약한 사람들 앞에 서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이 생각한 사랑의 방식이었습니다.


유머가 뛰어 난 따뜻한 분
그분은 또한 유머가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제주도 가시려고 항공사에 전화했다가 황당한 일을 당하신 적이 있습니다.  직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수환 씨는 예약돼 있는데 '추기경' 씨는 예약이 안 되어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분이 답하셨습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랑 신혼여행을 가야 하지요?"

포항공대로 강의를 가시던 기차 안에서 학생들에게 삶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설명하시던 도중, 간이매점 직원이 절묘하게 외쳤습니다. "삶은 계란 있습니다!" 기차 안이 폭소로 가득 찼습니다. 그분도 함께 웃으셨습니다.  고위 성직자이면서도 그분은 언제나 소탈하셨습니다. 스스럼없이 웃고 사람들 속에 섞이셨습니다. 소탈함이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스스로를 왜 바보라 했는가
그분은 생전에 자화상을 하나 그리셨습니다. 종이 위에 어설픈 선으로 그린 얼굴, 그 아래 직접 쓴 글씨는 나는 바보입니다 였습니다. 왜 바보였을까요. 그분의 설명은 이랬습니다. "잘 났으면 뭘 그렇게 크게 잘 났겠어요. 다 같은 인간인데 말이야.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으려 하는 게 바보지. 그러니 내가 제일 바보스럽게 산 것이지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아지기를 선택하는 것, 가진 것 버리기를 기뻐하는 것, 그것이 그분이 말하는 바보의 뜻이었습니다.
그분이 선종 후 설립된 재단의 이름이 '바보의나눔'인 것은 그래서입니다. 

두 가지의 선물
김수환 추기경님은 2009년 2월 16일에 눈을 감으셨습니다. 연명 치료를 거부하셨습니다. 미리 각막 기증을 서약해 두셨습니다. 선종 직후 수술이 진행되었고, 두 사람이 그분의 각막을 받아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에서 장기 기증 서약자가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사망 후 일주일 동안 각막 기증자가 너무 많아 장기기증운동본부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습니다.

그분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단 두 문장이었습니다. "그동안 많이 사랑받아서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대통령도, 재벌도, 어떤 유명인도 임종의 순간에 이런 말을 남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기에 할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출처:위키백과


그분이 가르쳐 준 행복론
그분의 행복론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남기신 말씀을 모아보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그분은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 년이 걸렸다." 사랑을 아는 것과 사랑하며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그분은 86년의 삶으로 그 차이를 보여주셨습니다.

둘째, 감사가 행복의 시작입니다. "재물 부자이면 걱정이 한 짐이요, 마음 부자이면 행복이 한 짐이다." 통장에 300만  원만 남기고 떠나신 분의 말씀이기에 더 무겁습니다.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부자라는 것입니다.

출처:나무위키

셋째, 용서는 나를 자유롭게 합니다. "용서하는 마음은 결국 나를 자유롭게 만듭니다." 독재 정권 아래서도, 갖은 위협 속에서도 그분은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원망이 없는 곳에 평화가 있고, 평화가 있는 곳에 행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출처:한국일보

넷째, 삶은 함께 걷는 길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길입니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먼 여정입니다. 함께 걸어가는 겁니다." 그분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편안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신자들과 밥을 나누던 안동 본당의 소박한 날들이었습니다. 추기경님은 훗날 그들과 함께 걸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 하셨습니다.

출처:연합뉴스

다섯째, 숙제하듯 살지 말고 축제하듯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될까보다 어떻게 살까를 꿈꿔라." 그분은 경쟁과 성공이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꾸라 하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성실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 하셨습니다.


바보의 지혜
추기경님이 돌아가신 지 16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명동성당 인근에는 지금도 그분의 이름을 딴 '사랑과 나눔공원'이  있습니다. 그분의 정신을 잇는 '바보의 나눔 재단'은 오늘도 소외된 이웃을 돕고 있습니다. 2024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시복 추진 승인을 받아, 언젠가 복자(福者)로 선포될 날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분의 삶을 돌아보면 행복은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집 막내아들로 태어나도, 아버지를 일찍 잃어도, 독재 정권과 싸워도, 병마와 씨름해도, 그분은 늘 행복을 품고 사셨습니다. 왜였을까요. 그분에게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이런 말씀도 남겼습니다. "당신이 태어났을 때는 당신만이 울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당신 혼자 미소 짓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이 울도록 하는 그런 인생을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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