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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파리의 카페를 제국으로 만든 반항아, 사르트르의 시대와 삶

by 행복 리부트 2026. 3. 30.

이제 우리는 우울하고 차가웠던 북유럽 코펜하겐을 떠나, 담배 연기와 재즈 선율이 흐르는 20세기 프랑스 파리의 카페로 무대를 옮겨볼까요? 그곳은  신이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허허벌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잿더미 위에서, 인간은 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다!며 핑계 대는 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친 철학계의 록스타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입니다. 지금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 속으로 들어 갑니다.

잿더미가 된 유럽, 이성과 신의 완벽한 파산 선고

우리가 사르트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20세기 중반의 끔찍하고도 극적인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1940년대의 유럽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인류는 과학과 이성을 발전시켰지만, 결과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과 두 번의 끔찍한 세계대전이었습니다. 히틀러는 파리를 점령하고 수많은 지식인과 시민들을 짐승처럼 죽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폐허가 된 파리의 거리에 선 청년들은 심각한 허무주의에 빠졌습니다. 이토록 참혹한 살육전이 벌어질 때, 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인간의 위대한 이성이라는 것이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 무기를 만드는 것이었단 말인가?

신도, 이성도, 도덕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뼈저린 절망위에서, 검은 뿔테 안경에 파이프 담배를 문 자그마한 체구의 철학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를 선언하며, 방향을 잃은 전후 세대 청년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그가 바로 20세기 실존주의의 정점,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였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 내게 정해진 운명은 없다

사르트르는 1905년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태어난 지 불과 15개월 만에 아버지가 열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앞서 만났던 키에르케고르가 끔찍한 저주를 물려준 아버지 때문에 평생 죄의식에 시달렸던 것과 정반대로, 사르트르는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엄청난 철학적 영감을 얻습니다.

그는 훗날 자서전 <말, Les Mots, 1963>에서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 가신 것은 내게 엄청난 축복이었다.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고, 내 운명을 지시하는 초자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명한 신학자이자 의사인 알베르 슈바이처의 친척이었던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외할아버지의 서재는 어린 사르트르의 놀이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자신이 이 집안에서 필요 없는 존재, 뚜렷한 목적이나 역할 없이 그저 세상에 툭 던져진 무의미한  존재라고 느꼈습니다.

 

이런 어린 시절의 묘한 소외감은 훗날 인간은 아무런 목적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피투성)라는 그의 핵심 철학으로 자라납니다.

외모 콤플렉스를 천재적인 지성으로 압도하다

사르트르의 외모는 호감형이 아니었습니다. 키는 160cm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고, 어릴 적 앓은 병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은 심한 사시였습니다. 양쪽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아 사람들이 그와 대화할 때 어디를 봐야 할지 당황할 정도였죠.

하지만 그에게는 이러한 신체적 약점을 덮고도 남을 폭발적인 지성과 유머 감각, 그리고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최고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지식의 괴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의 평생의 동반자이자 실존주의 주인공이 될 위대한 여성 철학자, 보부아르를 만나 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계약 결혼을 맺게 됩니다.

 

사르트르의 압도적인 지적 매력은 당시 수많은 여성을 매료시켰으며 그는 파리 지성계의 진정한 카사노바이자 록스타로 군림했습니다.

상아탑을 뛰쳐나와 카페로 향한 철학자

사르트르가 그토록 대중적인 열광을 얻었던 이유는, 그가 철학을 대학의 고리타분한 강의실에서 끌어내어 시민들이 숨 쉬는 일상의 공간으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갇히기도 했던 그는, 풀려난 뒤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 거리에 있는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와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에 지정석을 만들어두고 출근하다시피 했습니다.

난방이 잘되지 않던 시절, 따뜻한 카페의 난로 옆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하루 종일 글을 썼던 것이죠. 그는 이곳에서 최고 걸작인 <존재와 무, 1943>를 집필했고, 소설 <구토, 1938>를 썼으며, 보부아르를 비롯한 수많은 지식인, 예술가들과 담배 연기를 뿜으며 치열하게 토론했습니다.

사르트르의 철학은 더 이상 우주의 원리를 논하는 따분한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점심에 무엇을 먹을 것인가?, 전쟁에 참전할 것인가, 늙은 어머니를 모실 것인가 같은 자기 삶의 구체적이고 찌질한 선택의 문제들이 모두 철학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파리의 청년들은 검은 터틀넥을 입고 재즈를 들으며 사르트르의 철학을 논하는 것을 최고의 힙(Hip)한 문화로 여겼습니다. 실존주의는 심오한 철학을 넘어 20세기를 강타한 문화적 신드롬이 되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뻥 차버린 절대 자유의 반항아

사르트르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은 1964년에 일어납니다. 스웨덴 한림원은 사르트르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고 발표했습니다. 전 세계 모든 작가와 지식인들이 평생을 바쳐 꿈꾸는 최고의 영예이자, 엄청난 상금이 주어지는 자리였죠.

그런데 사르트르는 기자회견을 열고 이를 단칼에 거절해 버립니다. "나는 노벨상 수상을 거부합니다. 작가는 그 어떤 제도나 권력에 의해서도 기관(Institution)으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오직 나 자신으로서 자유롭게 남고 싶습니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는 돈과 명예, 최고의 권위마저도 뻥 차버린 통쾌한 반항아였습니다.

 그는 평생 우파와 좌파를 오가며 권력에 쓴소리를 던졌고, 알제리 독립 전쟁을 지지했으며, 68혁명 때는 대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위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거리에서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자유를  위해 자신의 철학을 온몸으로 실천한 지식인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핑계 대는 자들에게 날린 일격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낸 사르트르 철학의 중심에는 하나의 선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Man is condemned to be free)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자유를 축복으로 여기는데, 왜 그는 굳이 자유를 저주라는 거친 말을 선택했을까요?

그 이유는 신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만든 조물주가 없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주어진 정답이나 운명도 없다는 뜻입니다. 내비게이션도 없고, 나를 이끌어줄 부모나 신도 없는 캄캄한 황무지에 우리 홀로 툭 던져진 것입니다. 따라서 내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오직 내가 선택한 결과입니다.

내가 가난한 것도, 내가 불행한 것도, 심지어 전쟁터에서 총을 쏘는 것도 환경의 탓이 아니라 철저히 나의 선택입니다. 이렇게 완벽한 자유는 우리에게 엄청난 책임의 무게를 지웁니다. 누구에게도 선택을 핑계로 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이 꼬일 때마다 이렇게 변명합니다. 부모님이 나를 흙수저로 낳아서, 사회가 썩어빠져서 내가 성공을 못 하는 거야, 내 안에 억눌린 무의식(트라우마) 때문에 내가 화를 내는 거라고요.

사르트르가 이런 변명을 듣는다면 카페 테이블을 치며 이렇게 일갈할 것입니다. “변명은 그만하라. 너를 불행하게 만든 건 부모도 사회도 과거의 상처도 아니다. 불행을 이유로 주저앉기를 선택한 너 자신일 뿐이다. 너는 어떤 핑계도 댈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자유롭다.”

이것은 상처를 외부 탓으로 돌리며 값싼 위로를 찾던 현대인들에게  벼락처럼 떨어진 일격이었습니다. 사르트르에게 과거의 상처나 환경은 도망칠 핑계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자신이 선택한 삶입니다.

 

불행한 삶도 자신이, 행복한 삶도 자신이 선택한 결과입니다. 이런 사상이 사르트르가 우리에게 던진 실존주의의 위대한 서막입니다.

철학 교사에서 전업 작가, 그리고 잡지사 발행인

사르트르의 첫 공식 직업은 고등학교 철학 교사였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는데, 넥타이를 매지 않고 교단에 서거나 학생들과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며 격의 없이 토론하는 파격적인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의 책과 희곡들이 문자 그대로 초대박을 터뜨리면서 교사직을 그만둡니다. 그의 책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그가 창간한 진보 잡지 <현대, Les Temps Modernes, 1945>는 프랑스 지성계의 최고 권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인세와 강연료, 공연 수익을 거둬들인 갑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돈을 모으거나 부동산을 사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평생 자기 집을 소유하지 않았고 호텔이나 작은 아파트에서 월세를 살았습니다.

대신 그는 번 돈을 친구들과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아낌없이 뿌렸습니다. 카페에 가면 항상 그가 술값과 밥값을 모두 계산했고, 돈이 필요한 지인들에게는 서슴없이 지갑을 열어주었습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 문화 시장에서 가장 성공한 지식인이었던 셈입니다.

5만 명의 시민이 뒤따른 거대한 장례식

사르트르는 평생 많은 양의 담배(하루 2갑 이상)를 피우고 독한 술을 마시며, 잠을 자지 않기 위해 각성제를 한 움큼씩 삼키며 글을 썼습니다. 결국 말년에 건강이 급격히 악화하여, 1973년 무렵에는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어 완전한 맹인이 되고 맙니다.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그는 비서이자 친구였던 피에르 빅토르와 매일 대화를 나누며, 녹음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끝까지 다듬고 세상과 소통하는 초인적인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1980년 4월 15일, 사르트르는 74세의 나이로 파리의 한 병원에서 폐수종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장례식은 프랑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무려 5만 명이 넘는 파리 시민들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의 관을 뒤따랐습니다. 정부가 주도한 국장이 아니었습니다.

 

노동자, 학생, 예술가 등 그가 일평생 사랑하고 대변했던 평범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그들의 영원한 멘토에게 눈물의 작별을 고한 것입니다.

그의 시신은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고, 6년 뒤 평생의 연인이자 지적 동반자였던 보부아르가 세상을 떠나며 그의 곁에 합장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죽음 이후에도 서로를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완벽하게 결합한 실존주의적 사랑의 전설로 남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 청년들의 우상, 철학의 교황과 한물간 철학자

1940~50년대 사르트르의 인기는 오늘날의 방탄소년단(BTS)이나 마이클 잭슨에 비견될 정도였습니다. 그의 사상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행이었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은 사르트르처럼 검은색 터틀넥을 입고 다녔고, 카페에 앉아 실존을 논하는 것이 가장 세련된 지식인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명실상부한 프랑스 지성계의 교황이자 억압에 저항하는 전 세계 청년들의 절대적인 우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권력은 없는 법입니다. 19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미셸 푸코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같은 구조주의(Structuralism) 철학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사르트르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인간이 완벽하게 자유롭다고? 착각하지 마라. 인간은 사회의 구조, 언어,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갇힌 꼭두각시일 뿐이다!"

사르트르의 '인간의 절대적 자유와 주체성'은 낡고 순진한 낭만주의 취급을 받으며 학계의 주류에서 밀려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그가 말년에 공산주의인 소련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가 소련의 헝가리 침공 사태를 보며 뒤늦게 후회하는 등, 오락 가락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여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21세기가 된 지금, 사르트르는 다시 부활하고 있습니다. 잘 짜인 시스템 속에서 무기력해지고 핑계 거리를 찾는 현대인들에게, 사르트르가 말한 환경을 탓하지 마라. 네 삶은 결국 네가 선택한 것이란 뼈아픈 일침은 오늘날 심리 치료 못지 않는 동기부여이자 자기계발의 철학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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