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저주한 가문의 우울증, 그리고 세기의 파혼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요? 우리는 마침내 쇼펜하우어의 고독, 헤겔의 역사, 니체의 망치를 지나 인간의 무의식으로 다가갑니다.

지금부터 철학이라는 거울 앞에 개인을 발가 벗긴 실존주의의 아버지,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의 삶을 알아 봅니다.

매일 밤 정체 모를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키에르케고르의 삶 자체는 위로가 됩니다. 부유했지만 끔찍한 저주를 품었던 가문, 그리고 철학사에서 가슴 아픈 세기의 파혼까지, 북유럽 소설 같은 그의 생애를 돌아봅니다.

저주받은 핏줄
1813년, 북유럽의 덴마크 코펜하겐입니다. 당시의 코펜하겐은 안데르센이 아름다운 동화를 쓰고, 낭만주의 예술이 꽃을 피우던 황금기였습니다. 이처럼 화려한 도시의 가장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늦둥이 막내아들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키에르케고르입니다.

그가 태어날 때, 집안은 우울증과 죄의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원인은 그의 아버지, 미카엘 키에르케고르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가난한 양치기 소년이었습니다.
혹독하게 추운 겨울밤,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어린 아버지는 언덕에 올라가 하늘을 향해 주먹을 쥐고 신이시여, 왜 나를 이토록 끔찍하게 버려두십니까? 라며 신을 저주했습니다.

기묘하게도 그날 이후, 아버지는 코펜하겐으로 건너가 사업에 크게 성공하여 엄청난 갑부가 되었습니다. 돈은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늘 편치않았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아버지는 내가 신을 저주하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부자가 되었다. 신이 언젠가 우리 가문에 끔찍한 저주를 내릴 것이라는 극심한 강박과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첫 번째 부인이 죽고 1년도 지나지 않아 하녀였던 두 번째 부인을 임신시키며, 아버지의 죄책감은 커져 갔습니다. 두 번째 아내가 키에르케고르의 어머니였습니다.

저주가 통한 것일까요? 7명의 남매 중 5명이 서른 살을 넘기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떠납니다. 어린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끔찍한 가족사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지독한 우울증과 신에 대한 치명적인 죄의식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헤겔을 비웃은 아웃사이더
코펜하겐 대학에 입학한 키에르케고르는 신학과 철학을 공부합니다. 당시 유럽과 덴마크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던 사상은 우리가 앞서 만났던 헤겔의 철학이었습니다. 모든 교수와 학생들이 인간의 역사는 우주의 위대한 절대 정신(이성)이 발전해 나가는 거대한 과정이라며 헤겔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분위기가 역겨웠습니다.

그는 펜을 들어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헤겔을 향해 거침없는 독설을 날립니다. '헤겔의 철학은 거대한 궁전을 화려하게 지어놓고, 정작 자신은 그 옆에 개집을 지어놓고 사는 꼴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우주의 역사, 인류의 진보, 절대 이성... 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완벽한 궁전 속에 정작 피 흘리고 고통받는 개인(실존)이 머물 공간은 없다는 뜻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인류 역사가 정반합으로 발전하면 뭐 합니까? 당장 오늘 밤 내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고, 내가 우울증에 미쳐버릴 것 같은데 헤겔의 역사가 나에게 무슨 위로가 됩니까?" 그는 국민이 헤겔을 통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찾을 때 등을 돌렸습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다. 나는 오직 나에게 진리인 것,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나만의 주체적 진리를 찾고자 한다." 이러한 선언이 바로 개인의 내면을 철학의 중심에 둔 실존주의의 서막이었습니다.

철학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이별
키에르케고르의 삶에 결정적인 사건은 24살에 일어 납니다. 어느 봄날, 친구의 집을 방문했던 키에르케고르는 열네 살의 눈부시게 아름답고 발랄한 소녀, 레기네 올센(Regine Olsen)을 만나 첫눈에 반하며, 운명적인 사랑에 빠집니다.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던 그의 인생에 레기네는 유일하게 비친 따뜻한 햇살과도 같았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녀가 성인이 되기를 3년이나 기다렸고, 마침내 그녀에게 정식으로 청혼하고 이어서 약혼합니다. 코펜하겐의 모든 사람이 선남선녀의 약혼을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약혼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심각하게 갈등합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가문의 끔찍한 저주, 자신이 안고 있는 지독한 우울증, 그리고 뼛속 깊은 죄의식 등 어둡고 병든 자신이 맑고 순수한 레기네의 인생을 망칠 것이라는 불안에 휩싸인 것이었습니다.

나처럼 신의 저주를 받은 우울한 인간이 어떻게 저토록 아름다운 천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결혼이라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는 인간이다. 결국 1년 뒤, 키에르케고르는 일방적으로 약혼 반지를 돌려보내며 파혼을 통보합니다.
레기네는 충격에 빠져 그에게 매달렸고, 심지어 레기네의 아버지까지 찾아와 내 딸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사정했지만, 그는 눈물을 머금고 차갑게 돌아섰습니다.

심지어 그는 레기네가 자신을 깨끗하게 잊고 미워하도록, 일부러 코펜하겐 시내를 돌아다니며 바람둥이인 척 연기하는 자학까지 저지릅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평생 그는 레기네 한 사람만을 사랑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자신의 모든 재산과 저작권을 그녀에게 남긴다는 유언장을 작성해 두었습니다.

유산을 불태운 독립 출판인
그는 직장이나 직업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대학 교수직도 거부했고, 목사가 될 자격이 있었지만 목사 안수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글을 쓰는 작가이자 사상가가 그의 유일한 직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먹고살았을까요?
아버지가 남겨준 막대한 유산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최고급 와인을 마시고, 방마다 화려한 촛불을 켜놓고 서서 글을 썼습니다. 특히 그는 출판사들이 그의 난해한 책을 내주려 하지 않자 자신의 유산으로 책을 출판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유산도 방대한 책들의 출판 비용으로 인해, 그가 죽기 직전에 통장 잔고는 제로에 가까운 파산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철학적 사명을 위해 평생의 부를 모두 투자하였던 것입니다.

상처에서 피어난 걸작
가장 사랑했던 여인을 잃고 쏟아지는 사람들의 비난 속에 철저히 고립된 키에르케고르, 극심한 상실의 고통과 절망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심리 철학자가 되도록 한 이유였습니다.
그는 밤낮없이 방에 틀어박혀 미친 듯이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1843>, <공포와 전율, 1843>, <반복, 1843>, <불안의 개념, 1844> 등 인간 심리의 바닥을 들여다 보는 명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는 이 책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내지 않고 요하네스 데 실렌티오(침묵의 요한), 빅토르 에레미타(승리한 은둔자) 등 수많은 가명을 사용하여 출판했다는 점입니다. 인생에는 여러 가지 선택지와 삶의 방식이 있는데,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는 대신 각기 다른 인물들의 입을 빌려 독자 스스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도록 유도한 연출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낮이면 코펜하겐의 거리를 거닐며 사람들과 대화하고, 밤이면 서서 글을 썼습니다. 척추에 병이 있어 등이 굽고 한쪽 다리가 짧았던 그가 코펜하겐 거리를 걸어갈 때면 사람들은 그를 조롱거리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의 외모는 당시 기준에서 조금 독특했습니다. 등이 약간 굽어 있었고, 두 다리의 길이가 달라 걸을 때마다 절뚝거렸으며, 몹시 마른 체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코펜하겐 거리를 산책하며 평범한 시민들과 대화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낙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1845년, 덴마크의 유명한 풍자 잡지인 코르사르(Corsaren)와 지독한 논쟁이 붙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이 잡지의 수준 낮음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자, 잡지사는 악의적인 보복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의 굽은 등, 짝짝이 다리, 바짓가랑이 길이가 다른 모습, 그리고 깡마른 몸을 우스꽝스럽게 그린 만평을 매주 대서특필했습니다.

만평의 파급력은 끔찍했습니다. 코펜하겐의 어른들은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웃었고, 길거리의 아이들은 그를 쫓아다니며 돌을 던지거나, 그의 책 제목인 저기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지나간다라며 놀려댔습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엄청난 상처를 받았습니다. 대중이 얼마나 무지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체험한 그는 군중은 가짜다, 오직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개인)만이 진리다라는 자신의 철학을 더욱 날카롭게 파고 들었습니다.

그는 세상과 타협하는 타락한 기독교 교회를 향해 맹렬한 비판을 쏟아내다 모든 권력과 언론의 표적이 되었지만, 끝까지 자신의 진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855년, 평생을 짓눌렀던 불안과 고독을 글로 다 쏟아낸 42세의 철학자는, 길거리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 뒤 평온한 얼굴로 세상을 떠납니다.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사랑을 멈추지 않았던 레기네 올센을 가슴에 품고서 말이죠.

장례식장의 난동
그의 장례식은 철학사에서 손꼽히는 극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말년에 키에르케고르는 덴마크의 공식 국가 교회인 루터교가 썩어빠졌다고 맹렬히 비판했습니다. 주말마다 교회에 나와 사교 모임이나 즐기면서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착각하는 자들은 가짜다, 덴마크 교회는 신앙을 팔아먹는 장사꾼들이다라며 기관지에 불을 뿜었죠.
그런데 그가 쓰러져 죽자, 역설적이게도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국가 교회의 공식적인 형식으로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심지어 장례식을 집례한 사람은 국가 교회의 주교였던 그의 친형 페테르(Peter)였습니다. 장례식 당일, 키에르케고르의 조카였던 헨리크 룬드가 참다못해 무덤가에서 소리치며 난동을 부렸습니다.

나의 삼촌은 이 위선적인 교회를 평생토록 증오했다. 삼촌의 시신을 교회의 이름으로 묻는 것은 고인에 대한 끔찍한 모독이다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는 군중과 경찰에 의해 쫓겨났고,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한 이단아였던 키에르케고르는 교회의 품에 묻혔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영원한 아이돌은 소크라테스였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불편한 질문을 던져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려 했던 등에(Gadfly, 소를 찌르는 벌레)였던 것처럼, 키에르케고르 자신도 잠들어 있는 코펜하겐 시민들의 정신을 찌르는 철학적 등에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100% 헤겔에 대한 반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거대한 우주의 역사와 시스템만을 강조하며 개인의 불안과 고통을 무시했던 헤겔 철학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생애를 바쳤습니다. 사람들은 사후에 그를 어
떻게 평가를 했을까요?

당대 코펜하겐의 시민들과 철학자들은 그를 글을 쓸 줄 아는 미치기 일보 직전의 괴짜 정도로 치부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무시당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반세기가 지나 제1차세계 대전이라는 끔찍한 참상이 터지자, 인간의 이성과 역사에 절망한 유럽의 사상가들이 드디어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며 전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20세기를 지배한 실존주의 철학의 거대한 출발지가 되었습니다. 장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는 물론이고,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 그리고 현대 신학의 거장 카를 바르트와 심리학자 롤로 메이에 이르기까지, 그는 사후에야 비로소 전 세계 지성계를 호령하는 진정한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화려하게 부활하였습니다.
다음은 키에르케고르의 핵심 철학인 인간은 군중 속의 하나가 아닌 신 앞에 홀로 서는 단독자가 무엇인지 알아 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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