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테네의 등에
소크라테스는 이전의 철학자들과는 다른 유형의 인간이었다. 탈레스나 피타고라스처럼 하늘의 별을 관찰하며 만물의 근원을 탐구하지도 않았고, 파르메니데스처럼 존재의 본질에 대한 복잡한 시를 쓰지도 않았다.

그는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대신, 먼지 나는 아고라 광장과 시끌벅적한 시장 바닥을 자신의 연구실로 삼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지식을 주입하고 수업료를 받는 소피스트들과 달리 돈 한 푼 받지 않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끈질기게 질문을 던졌다. 그의 못생긴 외모와 남루한 행색, 그리고 사람을 가리지 않고 던지는 당혹스러운 질문들은 그를 아테네에서 가장 유명한 기인으로 만들었다. 그의 기이한 철학적 여정은 델포이 신전에서 내려진 하나의 신탁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친구 카이레폰이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있는가?”라고 묻자, 신전의 여사제는 “없다”고 대답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신탁에 큰 충격을 받았다. 스스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그는 신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그 신탁의 진짜 의미를 밝혀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아테네에서 지혜롭다고 소문난 정치가, 시인, 기술자들을 찾아가 그들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정의란 무엇이오?”, “용기란 무엇이오?”, “아름다움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부여한 신성한 사명이자 서양 철학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탐구의 시작이었다. 훗날 그는 법정에서 자신을 신이 아테네라는 커다랗고 굼뜬 말에 붙여놓은 한 마리의 등에(gadfly)에 비유했다. 등에는 쇠파리과에 속하는 곤충이다. 등에는 말을 성가시게 하지만 바로 그 성가심 때문에 말이 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의 잠든 영혼을 콕콕 쏘아대어, 그들이 당연하게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을 의심하고, 진정한 앎을 향해 나아가도록 깨우는 철학의 등에였던 것이다.

2.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 철학의 제1원칙이자 모든 탐구의 출발점은 바로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 신전의 격언이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내면 심리를 들여다보거나 개성을 찾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핵심은 바로 네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라는 뜻이었다. 즉,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혜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테네의 지혜자들을 찾아다니며 이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했다.

예를 들어, 용맹하기로 이름난 장군 라케스를 찾아가 물었다. 장군, 당신은 용기의 전문가이니 묻겠소. 용기란 무엇이오? 라케스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간단하지. 전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굳건히 싸우는 것이 바로 용기라네. 소크라테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적을 유인하기 위해 후퇴하는 척하는 전략은 비겁한 것입니까? 또한, 전투가 아닌 일상생활, 예를 들어 병마와 싸우거나 바다의 풍랑과 맞서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 없다는 말씀이신지요? 몇 차례 질문이 오가자, 라케스의 명쾌했던 정의는 산산조각이 나고, 그는 결국 자신이 용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당대 최고의 궤변가이자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던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프로타고라스가 덕(德)에 대해 가르칠 수 있다고 장담하며 화려한 연설을 늘어놓자, 소크라테스는 순진한 표정으로 그저 이렇게 물었다. “훌륭한 말씀이오만, 저는 좀 기억력이 나빠서 그러니 간단하게 다시 한번만 말씀해주시겠소? 덕은 단 하나입니까? 아니면 정의, 경건, 지혜 같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는 것입니까? 만약 나뉜다면, 그것들은 금덩어리의 조각들처럼 본질이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얼굴의 눈, 코, 입처럼 각기 다른 기능을 하는 것입니까?” 이처럼 핵심을 찌르는 질문 앞에서 프로타고라스의 화려한 수사는 힘을 잃고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다. 아테네의 명사들은 사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신들이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반면 소크라테스 자신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고 있었다. 바로 이 무지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지혜로운 이유였다. 이처럼 그의 철학은 화려한 지식의 자랑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지적 정직성에서 출발한다.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교만한 영혼에는 새로운 앎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 영혼의 산파술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다면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지식을 낳도록 도와주는 영혼의 산파라고 불렀다. 그의 어머니 파이나레테가 아기를 낳는 산모를 도왔던 것처럼, 그는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영혼 속에 이미 잉태되어 있는 진리가 스스로 태어나도록 돕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산파술이라 불리는 소크라테스식 대화법, 즉 문답법의 핵심이다. 산파는 아기를 직접 잉태하지 않는다. 그저 산모가 고통을 이겨내고 순산하도록 곁에서 격려하고 이끌어 줄 뿐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대신, 끈질긴 질문을 던짐으로써 상대방이 스스로 생각을 점검하고, 그 안에 담긴 모순과 허위를 발견하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릇된 억견이라는 유령 아기를 버리고 참된 앎이라는 진짜 아기를 낳도록 이끌었다. 여기에서 억견은 근거가 박약한 지식을 말한다.

이 과정은 때로 매우 고통스러웠다. 평생을 진리라고 믿어왔던 생각이 논박당하고 무너져 내리는 경험은 당사자에게 큰 모욕감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젊고 혈기 왕성했던 알키비아데스 같은 청년은 소크라테스와의 대화 끝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무지함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이 지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피하거나 미워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그가 고발당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아포리아(aporia), 즉 막다른 길에 부딪힌 상태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시작이라고 믿었다. 편안하고 안락한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없는 혼란과 고통을 겪어야만 비로소 진리를 향한 열렬한 갈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의 산파술은 단순히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방의 영혼을 뒤흔들어, 안이한 독단의 잠에서 깨우고,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이끄는 영혼의 산파술이었던 것이다.

4. 덕(德)은 지(知)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참된 앎, 즉 지식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윤리학의 핵심인 덕(Arete)은 곧 지식이다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그리고 이 명제로부터 아무도 일부러 악을 행하지는 않는다는 놀라운 결론이 따라 나온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 즉 행복을 원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떤 행위가 진정으로 자신에게 좋은 것인지를 안다면, 그는 반드시 그 행위를 할 것이라는 게 소크라테스의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의사가 독이 든 음식을 환자에게 주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환자에게 해롭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겁, 무절제, 불의와 같은 악덕을 저지르는 이유는 우리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영혼을 해치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눈앞의 쾌락이나 이익이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그것을 좇지만, 그것이 결국 자신의 영혼에 더 큰 해악을 끼친다는 사실을 안다면 결코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그 행위가 자신의 영혼에 부끄러움과 불안이라는 상처를 남겨 결국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진실을 모르고, 오직 눈앞의 재물이라는 가짜 좋음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윤리적 문제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였다. 악행은 ‘악한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무지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드는 방법은 그를 벌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참된 좋음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철학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지점, 바로 영혼에 대한 돌봄이다. 우리가 일생을 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무지로부터 벗어나 참된 앎과 덕으

로 가득 차도록 끊임없이 돌보고 수련하는 것이다. 육체의 건강보다 영혼의 건강이 훨씬 더 중요하며, 영혼을 가장 건강하고 훌륭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철학, 그 자체라고 그는 믿었다.
5. 검토되지 않은 삶
소크라테스의 모든 철학은 그의 마지막 순간 아테네 법정에서의 자기 변론에서 가장 극적으로 요약된다. 신을 부정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한 그는, 도망치거나 용서를 구하는 대신 자신의 철학적 삶이 얼마나 정당하고 필요한 것이었는지를 당당하게 역설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선언한다. 검토되지 않은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습니다. 이 말속에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에게 산다는 것은 단순히 숨 쉬고 먹고 잠자는 생물학적 과정이 아니 었다. 인간다운 삶이란, 매일 삶을 성찰하고, 무엇이 옳고 나쁜지, 무엇이 참되고 거짓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검토하는 삶이다. 이러한 철학적 검토가 없는 삶은 그저 짐승처럼 본능과 관습에 따라 떠내려가는 삶일 뿐,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철학하기를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삶으로, 아니 죽음으로 증명해 보였다. 그는 글 한 줄 남기지 않았지만, 진리를 위해 죽음을 택한 그의 순교자적 모습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서양 철학 2,500년의 역사에 가장 깊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그는 철학의 초점을 하늘에서 땅으로, 자연에서 인간의 영혼으로 돌려놓았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철학의 가장 중심적인 과제로 만들었던 진정한 의미의 첫 번째 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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