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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만들기/철학자와 행복

스크라테스의 시대적 배경과 삶(1)

by 행복 리부트 2025. 10. 21.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말 그대로 민주주의의 꽃이 피던 시기였다. 시민들은 아고라에 모여 토론하고, 직접 투표하며 나라의 일을 논했다. 철학, 예술, 연극도 활발했고, 광장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런데 그리스 밖은 조금 달랐다. 로마는 막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시작한 참이었다. 두 명의 집정관이 나라를 이끌었지만 여전히 귀족 중심의 정치였다. 평민들은 권리를 얻기 위해 거리로 나섰고, 사회는 질서와 법 중심으로 굴러갔다. 문화보다는 권력과 생존이 먼저였다.

 

이집트는 그 무렵 페르시아 제국에 정복당해 파견된 총독이 통치하던 시기였다. 오랜 전통의 파라오 문화는 흔들렸고,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했다. 그럼에도 이집트의 천문학과 의학, 수학은 여전히 최고 수준이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였다. 제후국들이 서로 경쟁하며, 전쟁이 지속되었다. 제, 진, 초, 노 같은 나라들이 흥망을 겪었고, 전국시대에는 진나라 등 일곱 강국이 군림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공자, 묵자, 노자, 장자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이 등장했다. 모두가 새로운 질서와 인간의 도리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한반도는 고조선의 쇠퇴와 함께 여러 부족 국가들이 부상했다. 북쪽에는 부여와 고구려가 있었고, 남쪽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 뿌리를 내렸다. 이들이 훗날 삼국시대의 주인공이 된다. 일본은 아직 씨족 중심의 야요이 시대(弥生 時代) 였다, 논농사와 철기 문화가 퍼지고 있었지만, 중앙집권의 정치권력은 등장하지 않았다.

일본의 야요이 시대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서기 300년경까지 이어진 시기. 조몬 시대의 수렵 채집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 중요한 전환기. 이 시대에 한반도를 통해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도입. 물을 다루는 기술을 익혀 논을 만들고 쌀을 생산하기 시작한 시기임

 

이처럼 소크라테스(Socrates, 470/469 BC – 399 BC)가 활동하던 시기는 전 세계가 문명의 전환기를 맞이하던 때였다. 정치 제도와 철학, 종교, 학문이 본격적으로 정비되고 있었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활발히 던져지기 시작했다.

길거리에서 귀족에게 질문하는 소크라테스

 

그 한가운데, 아테네의 거리 한복판에서 깊은 질문을 던지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강의실도 책도 없었다. 대신 사람들과 마주 앉아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진짜 행복한가요?”  그의 이름은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철학을 강의하지 않았다. 책도 쓰지 않았다. 그는 오직 거리를 걷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의 무기는 웅변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어떤 상태인가?” 그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각, 이를테면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성공한 삶이다', '다수의 의견이  곧 진리다' 같은 믿음을 끄집어내 질문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라고 되묻는  방식으로 당연하게 여겨졌던 가치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평소 아무 생각 없이 믿고 살아가던 것들을 하나씩 되물었다. 예를 들어,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 모두가 말한다고 해서 진실일까? 나의 삶은 내가 선택한 것일까? 그는 이런 질문으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찔렀다.  어떤 이는 깨달음을 얻고 감동했지만 어떤 이는 불편함을 느끼고 화를 냈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는 철학자였고 어떤 사람에게는 성가신 존재였다.

 

1. 광장에서의 행복

소크라테스는 행복을 물질적 소유나 감각적 쾌락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무지함을 인정하고, 그 무지를 성찰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대화법, 즉 산파술은 상대방이 스스로 생각을 드러내고, 그것을 반성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며,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이 말속에는 행복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중요한 전제가 담겨 있다. 그는 먼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모든 지혜는 '나는 모른다'는 솔직한 고백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곧 진정한 앎으로 가는 출발점이며 행복도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아는 것, 그리하여 삶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그저 법을 지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에게 그것은 진실하게 말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며, 유혹이나 편안함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의미한다. 옳다고 믿는 길을 선택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노력, 그는 이러한 실천 속에서 인간이 진정한 평온과 만족, 즉 행복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겉으로 화려한 삶이 아니라 속이 단단한 삶, 그것이 그가 말한 행복의 조건이었다. 

 

2. 행복은 앎과 성찰에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그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라고 하며 자신의 무지를 말한다. 이 태도가 바로 앎(知識)의 시작이자 성찰(反省)의 기반이다. 『파이돈』에서 그는 죽음 앞에서도 진리를 찾기 위해 “영혼을 대화와 성찰에 바쳐야 한다”고 말하며 자신이 믿는 바를 삶으로 보여준다. 『국가』와 같은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는 구체적으로 나오지만, 역시 소크라테스의 영향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는 행복이 단순한 쾌락이 아닌 영혼의 덕과 깊은 연결이 있다고 본다. 쾌락은 사라지지만 진리는 축적된다. 그는 정신의 건강, 즉 ‘영혼의 덕’을 통해 참된 행복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소크라테스의 변명』 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쓰지 않고 제자 플라톤이 기록한 대화편이다. 즉, 사형 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직접 한 진술(변명)을 바탕으로 플라톤이 정리한 내용이다.

 

3. 아내 크산티페와의 갈등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거리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 집에서도 그는 철학자였다. 그의 아내 크산티페는 전설적으로 성질 급한 아내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종종 감정적으로 격해졌고 소크라테스에게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그녀가 그에게 화를 내다가 결국 물을 퍼부었다는 이야기다.

물벼락 맞는 소크라테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천둥이 치면 비가 오는 법이지.” 또 다른 일화로는 소크라테스가 조용히 사색에 잠기려 할 때 크산티페가 말다툼을 걸었고, 그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고 한다. 제자들이 이유를 묻자 그는 대답했다. “집에서  가장 거센 사람에게도 침착할 수 있다면 세상 누구와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지.” 이런 일화들은 그의 철학이 일상의 태도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장면이다. 그녀는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시험대였고 그는 그것을 내면의 평정심을 연습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말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사람과 함께 살고 있으니 다른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다.” 그는 인간관계 속 갈등마저도 해학적으로 해석한다. 아내와의 갈등은 그에게 있어 내면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연습장이다.

그는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보다 상황을 관조하며 자신을 다듬었다. 이 또한 그의 행복 철학의 실천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집에서만 행복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달랐다. 그는 갈등이 있는 집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행복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내면의 태도에서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갈등을 고통이 아닌 성찰의 기회로 바꾸었다. 끓어오르는 감정 앞에서 자신을 다스리고 유머로 표현하며 의미를 새겼다. 천둥소리 같은 잔소리 속에서도 그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철학적 배움이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소하고 시끄러운 집안에서도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자신의 가치를 외부가 아닌 자기 내면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하게 말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며, 욕망이나 편안함보다 '바른 삶'을 선택했다. 바로 그 태도가, 어떤 소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만들어낸 것이다. 행복은 조용한 집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때론 소란스러운 집 안에서도 가능하다. 그것은 마음의 태도와 해석의 방식에 달려 있다.

 

4. 죽음 앞에서도 


소크라테스는 결국 기원전 399년, 아테네 시민 법정에 피고인으로 서게 된다. 고발 내용은 두 가지였다. 첫째, 그는 아테네의 전통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령을 도입했다는 신성 모독 혐의였고, 둘째는 젊은이들을 잘못된 사상으로 이끌어 타락시켰다는 교육 파괴 혐의였다. 이 혐의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전통적 가치와 윤리를 무시하게 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혔다고 보는 사회 전체의 불안과 반감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는 청년들에게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라'고 가르쳤고, 이는 기존 권위에 의문을 던지게 했다. 당시 아테네는 전쟁과 정치 혼란으로 인해 보수적인 기류가 강해지고 있었고, 시민들은 지식인과 급진적 사상에 불안감을 품고 있었다.  이 고발은 아니토스, 리콘, 멜레토스라는 세 사람이 주도했다. 

재판을 받고 있는 소크라테스

 

고소의 배경에는 정치적 변화와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지식인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었다. 이 중 멜레토스는 비교적 젊은 시인으로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운 형식적 고발자였다. 그는 문학 활동을 하던 인물이었으나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아니토스와 리콘이라는 정치적 후견인들의 지원을 받아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 플라톤의 『변명』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멜레토스를 날카롭게 질문하며 그의 논리적 허점을 드러낸다.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를 '국가가 믿는 신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신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이 오히려 신의 뜻을 따르는 행위라고 반박했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으나, 배심원단은 근소한 차이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는 벌금형이나 추방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그것을 거부하고 사형을 선택했다. 이는 법을 존중하고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겠다는 철학적 결단이었다. 결국 그는 독배를 마셨다. 이 모든 과정은 플라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은 도망치라고 말하지만 그는 남는다. 법과 정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을 '또 다른 무지'로 받아들이며 성찰의 마지막 지점으로 보았다. “죽음은 두 가지 중 하나다. 무가 되거나 또 다른 삶이 있거나. 그 어느 쪽이든 나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 이 철저한 자기 성찰과 담담함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행복의 정점이다.

 

특히 첫 번째 고발 내용인 '신성 모독 혐의'는 오늘날에도 자주 회자된다. 소크라테스는 전통적인 신을 부정했다기보다는 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했다. 그는 다이몬이라 부르는 내면의 신적 음성을 자주 언급했다. '다이몬'은 그리스어로 인간과 신 사이의 중간 존재를 의미하는데, 소크라테스는 이를 일종의 양심이자 내면의 도덕적 직관으로 여겼다. 그는 이 다이몬이 때때로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하지 말라고 조용히 알려준다고 믿었다. 흥미로운 점은, 다이몬이 항상 '하지 말라'고만 말했지 '이렇게 하라'고는 지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종의 내면 경계 시스템처럼 작용했으며 소크라테스는 이를 신적 계시로 이해하고 매우 신중하게 따랐다.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이 낯설고 이상하게 들렸기에, 그가 새로운 신을 만들었다고 오해했던 것이다.  멜레토스는 이러한 점을 들어 그가 무신론자라고 주장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신의 명령이기에 철학을 멈출 수 없었다"고 말하며 자신이 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해명했다. 

 

그는 기존의 신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더 도덕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신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제자 플라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오히려 죽음 이후의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려 했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육체로부터 해방된 영혼이 진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기록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존경한 제자였기에, 그의 담대함을 이상화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삶의 태도(자기 성찰, 진리 탐구, 양심에 따른 실천)를 볼 때, 죽음을 앞두고도 철학을 멈추지 않았다는 핵심 정신은 사실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준다.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

 

죽음이라는 절대적 공포 앞에서조차 침착하게 진리를 추구한 그의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내면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묻는다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진정한 내면의 자유'란 외부의 억압이나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정신적 자율성을 말한다. 그는 죽음을 앞둔 법정에서도 자기 철학을 굽히지 않았고 감정적 격랑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했다. 이는 철저히 성찰하고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삶의 결과였다. 그는 타인의 시선이나 공포, 불이익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이성과 양심에 따라 선택했다. 바로 그 태도가 흔들림 없는 자유, 내면에서 비롯되는 고요한 행복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5. 철학의 순교자

서양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글을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를 따르던 제자들의 찬사와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의 기록 속에 남아있다. 당대의 소크라테스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았다. 플라톤을 비롯한 소수의 젊은이는 그를 지혜를 사랑하고 영혼의 수련을 가르치는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아테네 시민들은 그를 위험하고 불편한 인물로 여겼다. 그는 말 장난으로 사회질서와 전통적 가치를 훼손하는 궤변가(소피스트)로 오해받았다. 

 

오늘날 소크라테스는 서양 철학의 가장 위대한 순교자이자 모든 철학자의 원형으로 추앙받는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그의 말은 인문학 정신의 근간이 되었다. 그의 대화와 질문을 통한 탐구 방식, 즉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은 교육과 논리학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부당한 판결 앞에서도 진리를 향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독배를 마셨다. 이 모습은 진리를 위해 죽음을 택한 지식인의 영원한 상징이 되었다. 결국 그는 자신을 죽인 아테네를 넘어 인류 전체의 스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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